안귀옥 변호사를 찾아서

안귀옥 변호사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흔히 신화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 인간에게 시련을 줄때는 인간이 견딜 만큼만의 시련을 준다.”라고 “그래서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라고. 

인천의 최초 여성변호사 1호로 알려진 안귀옥 변호사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6학년 중퇴로 12살부터 온갖 궂은일을 경험하며 초·중고 검정고시를 거쳐 스물여섯에 대학생, 서른여섯에 인천대 최초의 법조인, 인천 최초의 여성 변호사, 여성과 가사 전문 변호사, (사)한국행복가족 이사장 등 소위 말하는 인간승리로 대변하는 안귀옥 변호사. 

본지가 안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은 이날, 그녀는 “신이 내게 시련을 주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그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첫눈에도 막힘없는 어투와 시원스런 웃음이 세상과 맞장 뜬 배짱 두둑한 여장부의 저력이 가늠된다. 안 변호사의 인생역전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아버지 사업 실패에 12살 소녀 가장으로 나서 

“1969년 5월 26일,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학교를 그만두고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 일곱 식구가 자리를 잡은 곳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

그러니까 이때부터 내 험난한 길은 시작이었다. 당장 끼니 해결이 어려워 나와 오빠는 공장에 취업을 해야만 했고 하루 12시간노동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 등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평소에도 병약한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병이 더욱 악화돼 실질적인 가장은 12살 소녀 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탄하고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 치료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12살의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취업을 해야만 했으니 내 신세 한탄은 생각도 못했다. 다만, 소켓공장을 비롯해 가발공장, 의류공장 등을 전전하는 동안 중간관리자들로부터 받는 인간적인 모욕과 냉대가 감내하기 힘든 어려움이었다.

그래도 4년을 넘게 여공으로 일하다 보니 숙련공 대우에 월급도 오르고 또 그 사이에 병상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몸을 추슬러 행상에 나서자 그때서야 난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가 있었다. 

18세에 중학교 입학검정고시 합격

아니, 그때서야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녀야 하는 내 처지가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출근길에 우연히 차안에서 명문여고 교복을 입은 초등학교 친구를 본 그날 이후부터였다. 그러니까 그날 이후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동서양 고전을 읽었고 작업 중에도 영어 단어장과 수학공식 노트를 옆에 두고 외웠다.

그리고 야학을 다닐 수 있는 공장만으로 옮겨 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 결과 1976년, 내 나이 18살에 중학교 입학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기뻤다. 곧바로 고등학교 검정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고 싶었다.

4년 홀리데이여행에서 얻은 결론...10년을 목표로 공부에 도전

하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생계와 동생들의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에 나를 위한 투자는 당치도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갈등과 번민으로 여러 날 밤을 새웠다.물론 해답은 없었다.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만 했기에 워킹홀리데이로 4년을 돌았다. 그 여행을 마치고 결론에 도달한 것은 10년을 목표로 공부를 해보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공부는 마침내 1980년 11월 고등학교졸업자격검정고시반 등록에 이어 1982년 대입검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단다. 이때 그녀의 나이 서른여섯, 물론 그런 중에도 남동생의 대학학비와 두 동생의 중·고등학교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에 주경야독을 해야만 했고.

그러니 정작 자신의 대학은 준비시기를 놓쳐 전기대에 실패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우리 속담에 전화위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후기대에 속했던 인천대법학과에 장학생으로 무난히 합격에 이어 인천대학의 최초의 법조인 1호가 탄생되었으니. 그런데 그 어려운 여건에서 어떻게 사법고시에 도전할 생각을 했던 것인지. 

서른여섯의 인천대법대생

“솔직히 나는 사법고시가 그렇게 험난한 길인 줄 몰랐다. 아마 알았더라면 나는 감히 도전에 꿈도 꿔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4년 홀리데이 여행을 마치고 10년을 목표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은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이 시작이었다.

즉, 세계여행을 하자면 적어도 1억이 들 것인데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었고. 그럼 그 돈을 벌자면 공장 노동자 월급으로는 어림없고, 적어도 ‘사자’ 들어가는 직업에나 가능할 것인데, 의사, 교사. 약사는 내 적성이나 내 처한 환경에는 맞지 않을 터,

그러니 결국 판사, 검사 변호사가 가장 무난하다는 생각이었다. 사법고시는 의사처럼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10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돈이 없어도 도전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겁 없이 뛰어든 늦깎이 법대생. 그녀는 그 같은 부푼 꿈에 대학 시절 내내 식당 서빙, 텔레마케팅, 학습지교사, 커이로프랙틱 등 많은 일들을 전전하면서도 힘들 줄 몰랐단다.

아니, 꿈이 있었기에 새벽부터 온 몸의 기를 다쏟아내는 일들에도 지칠줄 모르는 오뚝이가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출석점수 미달로 받지 못한 4학년 한 학기 빼고는 전액장학금을 받아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단다. 하지만 정작 고행의 길은 졸업 후 부터였으니.  

거듭되는 사법고시 실패

“졸업 후 본격적인 사법고시준비를 해야 했는데 난 인천대 고시원에서 먹고 자며 하루 18시간을 공부를 했다. 돈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고시실이 학생회관 위층이다 보니 연일 이어지는 집회의 북소리에 공부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런 소음에도 집중이 되는 과목으로 밤과 낮을 분리해 공부했지만. 어쨌거나 난 주말마다 알바를 뛰어야 하는 등 늘 시간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악조건이었다.그런 속에서 1988년 처음으로 본 1차시험에서 합격이었다.

인천대 졸업생으로 최초의 합격자였다. 그러니 조금은 자만했던 모양이었다. 2차 시험을 앞두고 달랑 행정법 한권만 들고 대구의 여동생 산바라지에 나섰다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사법고시를 코앞에 앞두고 동생 산바라지에 나서겠다는 수험생이 몇이나 될까. 그런 무모함은 아무도 산모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듣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운데 문득 안 변호사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마도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아프다고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달려온 그 세월, 돌아보면 그 모든 게 세상과의 맞장 뜨는 고독한 싸움이었던 것을. 그러니 안 변호사는 실패의 거듭 끝에 드디어 합격의 영광을 안았던 1994년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내 생애 최고의 감동... 5전 6기의 합격의 순간 잊을 수 없어

“사법시험은 1차 시험 합격하고 2차 시험 불합격이면 다음해에는 2차만 보면 된다. 그런데 난 1988년 1차에 합격하고 2차 낙방, 1989년에도 2차 낙방, 1990년에는 또 다시 1차 합격하고 2차 낙방, 1991년 역시 2차 낙방, 1992년에는 1차에서조차 낙방,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인 1993년 1,2차가 모두 낙방이었다.

이러니 가족은 물론이고 교수님들과 고시반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되니 더는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없었고. 완전 의욕상실이었다.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 도전했고, 1994년, 서른 일곱에 5전 6기로 합격했다. 2차 시험 결과 발표가 있는 날 난 너무도 떨려 전화선을 끌어다 이불 속에서 ARS를 눌렀다. 합격이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다섯 번을 눌러 확인했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거듭되는 실패로 도전할 기운을 잃은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그녀는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 듯 한참이나 호흡을 참는 모습이었다. 

“모든 걸 좌절하던 그때 성대에 계시던 정규상 교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물론 다시 공부를 하라는 말씀이셨다. 그때 나는 다 때려치우고 돈이나 많이 벌겠다. 라고 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돈을 버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네 성격에 그걸로 만족할 수 있겠어? 라고 하시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포기하는 것인데. 그날 이후 다시 고시반에 들어갔다.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5년 전과 다름없이 씩씩한 것에 놀랐을 테고, 고시 입실자격 미달인 사람이 당당히 쳐들어오니 놀랐을 것이었다.

상관없었다. 무작정 쳐들어가 점령군처럼 자리를 꿰차고 그 이듬해 1차에 무사히 통과했다. 그렇지만 2차는 또 낙방, 그렇다고 내 오기를 꺾지는 못했다. 아니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드디어 1994년, 제 36회 사법고시 2차 시험 합격했다. 사법고시 준비 8년 만이었다.” 

이렇게 12살 소녀가장에서 5전 6기로 법조인의 대열에 낀 그녀. 하지만 변호사로 자라잡기까지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을 터, 더욱이 인천 최초의 여성변호사라는 타이틀은 또 하나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인천 최초의 여성법조인...“나를 알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난 지금껏 길이 보여서 걸은 것이 아니었다. 내 길은 내가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97년 당시 은행에 가 2억 원 대출을 받아 인천법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사무실을 얻었다. 내 배짱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를 알리기 위해서 변호사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무료상담을 해주었다. 사법연수원에서 판검사 등 여러 직무를 익히는 동안 기록보다는 직접 사람을 대면하는 변호사가 내 적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일이 벅차지도 않았다. 여성의 전화, 동사무소, 구청, 여성단체, 아동단체, NGO단체, 상공회의소 등 어디든 찾아다녔다. 

인천법률사무소 최초로 홈페이지를 열어 무료상담도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아침이면 수백 건의 상담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멀리로는 흑룡강성, 독일에서까지 상담문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3개월을 했다.

그러니 기적적으로 사무실 유지비가 내 수중에 떨어졌다.그렇게 3~4년을 더 하자 인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 중 하나로 탑 레벨로 꼽혔다. 그러자  2006년 열린우리당에서 같이 좀 일을 해보자는 권유가 들어왔고 지방선거를 통해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남북의 정서적 통일에 일익을 하는 것이...  

이렇게 또 하나의 타이틀을 획득한 안 변호사. 아니, 안귀옥 정치인, 이제 그녀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IMF의 고비를 넘기던 2002~2003년 당시, 두 가정 중 한 가정이 해체된다는 보도가 쏟아졌던 만큼 위기의 가정이 많았다. 그 무렵 정말 내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맡았던 남성이 가정불화로 이혼합의를 해주고 한강에서 자살한 사건이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단순히 변호만 잘해준다고 해서 사회적 역할을 다 하는 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로 SOS상담소를 열어 위기가정 상담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그리고 현재 그것을 확대해 사단법인 한국행복가족이란 명칭으로 부부회복프로그램은 물론 바우처사업을 운영하면서 청소년 진로캠프 등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이 모든 것들을 종합에서 같이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여기에 내가 특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남북한이 언젠가는 남북이 통일이 될 것인데 그때 남북한의 정서적 통일에 내가 일익을 해야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정치적, 경제적 통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남북한 정서적 통일은 많은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리라 보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는 그 문제에 나서야 하는데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현재 변협에서 통일법을 공부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2007년 심리치료상담학 석사학위취득에 이어 중국어를 공부했고 방통대에서 영문학을 공부 중에 있다."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다간...?”

이처럼 끊임없이 목표를 세워 도전장을 내미는 그녀는 이미 오래 전 묘비명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한다.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다간...?” 특정 명사대신 물음표를  설정한 것은 앞으로 자기가 어떠한 길을 달리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란다.

“난 크리스찬이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인데 난 그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자리를 마감하는 마지막 질문에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물으니  “모든 일에는 동기가 부여되고 어려움으로 오는데 그것을 회피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어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달리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안식과 쉼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