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화에 쉼 없이 달려온 세대들..‘늙어도 돈이 있어야’
김노인 “며느리 불편할까봐 나오던 곳... 이젠 이곳이 좋아”

서울시 종로 3가 탑골공원 주위에는 추운 날씨에도 장기두는 노인들이 모여 일과를 보내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서울시 종로 3가 탑골공원 주위에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없이 장기두는 노인들이 모여 일과를 보내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어느덧 한해를 마감하는 12월이다. 올 한해 연초의 계획대로 잘 살아온 것일까. 한 포털사이트의 이 같은 질문에 직장인들 10명 중 8명은 올 한해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어 연말이 허무하다는 답이었다. 그 때문에 연말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것이었고.

그러니 황혼을 달리는 노인들에게는 연말의 중압감은 더 하리라는 생각이다. 한국산업화의 주역으로 쉼 없이 달려온 세대들, 그럼에도 돌아보니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나이만 들었다고 자조 섞인 한탄으로 가버린 젊음을 안타까워하는 세대들. <본지>가 연말을 맞아 이들 노인들의 일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수도권에 이틀 연속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발령된 지난 11일 <본지>는 노인들의 홍대로 불리는 종로3가 소재 탑골공원을 찾았다. 역시나 1호선 전철역을 나서자마자 탑골 공원 주위로 많은 노인들의 모습이었다.

그깟 미세먼지는 아랑곳없다는 듯 마스크 착용 없이 노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짓거나 혼자서 터덜터덜 공원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이었다. 탑골공원 내에도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고. 무슨 얘기를 나누는 것일까. 그 중 가장 큰 목소리의 노인들 무리로 걸음을 옮겼다.

(사진=신현지 기자)
탑골공원에 모인 노인들의 모습(사진=신현지 기자)

한국당 원내대표 심재철 의원이 오늘의 화제인 모양이었다. 노인들에 둘러싸인 한 노인이 심재철 의원의 프로필을 나열하며 열변을 토하고 여기에 노인들이 맞장구 치고 반론에 소리를 높이고, 마치 유세장을 방불케 노인들은 소란했다. 물론 묵묵히 경청하는 노인도 있었고, 화제가 흥미가 없다는 듯 자리를 옮기는 노인도 보였다.

그 중에 그 무리에서 등을 돌리는 노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 망원동에서 나와 종로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낙이 되었다는 김경수(41년생)노인. 김 노인은 대뜸 “동네는 사람이 없어, 여기나 나와야 말벗이 있지, 그리고 여기는 무슨 말을 해도 서로 통하잖아, 배고프고 서러운 시절을 우리는 다 겪어왔으니”라고 쉽게 본지에 곁을 내어 주었다. 그런 김 노인의 고향은 충북 제천.

“11살 먹어 올라와 평생 건설노동판을 돌며 인테리업을 해왔어, 내가 41년생인데 일을 그만둔 지 이제 5년 됐어, 그 덕분에 집 두 채를 장만해 32평 아파트는 세를 주고 난 허름한 연립에 안식구랑 단 둘이 살아, 그런데 이놈의 세금 때문에 못 살겠어. 작년에 종부세 80만원 나왔는데 올해 280이 나왔어.

이게 몇 배야 문 정부가 해도 너무하잖아? 아니, 젊어서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죽기 살기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한테는 온갖 세금 올려 돈 다 뜯어가고, 젊어서 희희낙락 술이나 먹고 베짱이처럼 놀이판이나 기웃거리던 늙은이들에게는 노령연금이다 뭐다 해서 돈 다 퍼주고, 이게 뭐냐고.

난 장갑 한 짝 사는 것도 아까워 맨 손으로 그 험한 노동판을 전전해왔는데,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한테는 노령연금은커녕 오히려 뺏어다 지들 생색이나 내고. 난 정말 문 정부가 맘에 안 들어, 뭐가 잘 못 돼도 한참 잘못 됐어” 라며 마치 자신의 하소연 들어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도무지 자리를 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종로 탑골공원 주위의 한 공연장에 노인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종로 탑골공원 주위의 한 공연장에 노인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그런 김 노인에게 점심은 하셨냐니, 전에는 서울시가 천원을 받고 점심을 주더니 올해는 3천5백 원을 올려 집에서 먹고나오는 중이라고 말했다. 가끔은 원각사에서 먹기도 한다면서. 그런 노인은 상의 외투 주머니에서 음료병을 꺼내 기자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저기 피맛골 골목으로 가면 미가라는 식당이 있어 거기에 무명가수들이 나와 아침부터 공연을 하는데 그 가수들이 이런 음료를 무료로 줘, 그런데 미안해서 노인들이 그냥 공짜로 받아먹지 못 해, 돈 만원씩 찔러주고 하는데 가수들이 많으니 그 돈도 솔솔찮게 들어, 아니, 늙어도 돈이 드는 건 여전해, 그래서 난 이것만 받아가지고 나왔어, 장기나 한판 두고 집에 가려고 자 어서 마셔.”

그러니까 김 노인의 말인즉, 이곳 탑골공원 주위로 노인들이 즐길거리가 많아 하루가 그리 지루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기자가 눈빛을 반짝였던지 김 노인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역시나 노인을 따르니 탑골공원 외각에 10여개가 넘는 장기판에 빙 둘러앉은 노인들이 인산인해였다.

한참을 지켜보자니 장기판을 둘러앉은 노인들의 표정도 다양해 저절로 미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심각하게 장기판만을 노려보는 노인이 있는가하면 훈수를 두다가 혼나는 노인, 아예 저만치 내쫓기는 노인 등 놀이를 즐기는 모습은 세대를 막론한다는 느낌이었다.

탑골공원 주위의 홀로 떨어져 노숙하는 노인(사진=신현지 기자)
탑골공원 주위의 홀로 떨어져 노숙하는 노인(사진=신현지 기자)

그 중 저만치 내쫓긴 노인에게 춥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며느리 불편할까봐 이곳으로 나오던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추워도 나오는 것이 오히려 좋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런 노인들을 뒤로하고  피맛골 골목의 무명가수들의 무대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난 10월 대형 화재사고가 있었던 탓에 피맛골 골목은 당시 화재가 얼마나 컸을 지 짐작케 했고 그런 속에서 미가식당으로 들어가는 노인들을 찾기는 쉬웠다.

그러니까 김 노인이 말한 그 곳은 극장식식당이었다. 한때 소머리국밥으로 유명세를 탔던 식당에 극장식의 무대를 설치했다는 노인의 설명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사를 하는 노인 뒤편으로 화려한 무대였다.

그리고 무대 아래 약 100여개의 좌석일까. 객석을 가득 채운 노인들과 번쩍이는 조명이 돌아가고 가수들의 노래에 노인들은 잠시나마 세월을 잊은 듯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복을 입은 여성이 뭔가 망설이는 듯 탁자 주위를 맴도는 한 노인에게 다가와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만오천원 내라고 권유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뭔가 씁쓸했다. 아니, 김 노인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늙어도 돈이 드는 건 여전하다는 그 말이. 그곳을 나와 국일관을 찾아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이곳저곳 어느 놀이에도 들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 노숙하는 노인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1천을 들고 찾아가면 하루 종일 춤을 즐길 수 있다는 국일관의 콜라텍, 아마도 많은 노인들이 이날도 춤을 즐기고 있을 것이고 노인들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것이기에 그대로 전철역을 향했다.

한편 이날(11일) 국회에서는 노인기초연금을 내년 1월부터 소득 하위 40%까지 월 최대 30만원 지급하는 정부 계획이 그대로 통과됐다. 노인분야에서 기초연금 예산은 올해 11조4,952억원에서 내년 13조1,765억원으로 1조6,813억원(14.6%) 증액됐다. 지급 대상을 소득하위 20%에서 40%로, 지급액을 월 최대 25만원에서 30만원으로 확대하기로 한 계획에 따른 것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 국고지원 비율도 올해 18.4%에서 내년 19% 늘어나게 됐다. 지원액은 1조4,185억원이다. 장사시설을 새로 건립하는 비용으로는 469억원이 책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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