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갤러리 초대석 최한나의 맛있는 시(235)] 지우다,지워지다....최승아
[중앙 갤러리 초대석 최한나의 맛있는 시(235)] 지우다,지워지다....최승아
  • 최한나 기자
  • 승인 2020.04.07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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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오프너』펴낸 최승아 시인
사진 제공 / 최승아 시인
사진 제공 / 최승아 시인

 

지우다, 지워진다

최승아

 

땡볕이 내리쬐는 갓길

살수차에서 내린 공공근로자들이

벽보 위에 물을 끼얹고 있다

벽과 한 몸이 된 채

떨어지지 않는 포스터

죽어서도 흔적을 남기는 생이

구호를 외치며 뜯겨나간다

너덜거리는 자국 위로

한 떼의 먹구름이 몰려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구호

의미만 남은 글자 하나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다

잘못 든 길을 돌아 나오고 싶을 때

이정표 하나쯤

붙박아두고 싶은 것이다

                                            - 최승아 시집 『오프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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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민초들도 주권이라는 것을 행사할 시기가 도래했다. 바이러스의 난을 비집고 봄꽃들은 흐드러지는데 핏대를 세운 구호들과 무지갯빛 공약들이 방송과 인터넷, 그리고 벽보에서 분분 난무한다. 먹고살기에 바빴던 시선이 잠시 향하지만, 이젠 그야말로 물끄러미다. 나 역시 정치적 소신은 한 장 벽보보다 얄팍하기만 한 것 같고 무얼 딱히 믿거나 기대하지 않은지 오래다. 횡단보도 앞, 봄바람에 살랑이는 현수막은 철거를 기약한 것이라는 사실 밖에 아는 게 없는 나, 어김없이 도착한 한 보따리 선거공보가 실없이 웃는다. 뒷골방 노인들이나 부엌데기 아녀자들마저도 잠시나마 대접받는 듯 하여 심심치 않은 한철을 지나고 있다. 막이 내려지면 어김없이 뜯겨지고 지워져갈 그 우렁찬 애국 애족 애향의 구호, 함성, 박수소리들! 그들이 한 몸 던지겠다며 침 튀기는 약속들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이루어질까? 그래, 화자의 일갈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구호’(공약)일지 모르지만 ‘잘못 든 길을 돌아 나오고 싶을 때’ 내 손모가지 찍을 일만 생기지 않게 해줄 인물이라면 족하다. 누가 좀 가르쳐 주소! -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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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아 시인 /

2012년 《시와사상》등단

부산 작가회의 회원

시집 『오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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