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색채의 시인’,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내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예술은 모든 노동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락의자나 진정제 역할을 하는 것”

 

세기의 ‘색채의 시인’ 앙리 마티스.(사진=김종근 교수)
세기의 ‘색채의 시인’ 앙리 마티스.(사진=김종근 교수)

▲세기의 ‘색채의 시인’ 앙리 마티스

마티스의 이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평안함을 주는 미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1869년 프랑스 북쪽 카토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처음 법률에 뜻을 두었으나 맹장염 수술 후 뒤늦게 예술가로서 출발했다.

쿠스타프 모로의 도움으로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게 된 그는 인상주의를 버리고 폴 세잔의 견고한 구성, 폴 고갱의 장식적인 색면, 반 고흐의 색채의 영향을 받아 야수파의 대표작가로 성장했다.

쿠스타프 모로는 그에게 충고했다." 눈에 보이는 색으로 그리지 말고 상상력의 색채를 가지고 그리라"고(사진=김종근 교수)
쿠스타프 모로는 그에게 충고했다." 눈에 보이는 색으로 그리지 말고 상상력의 색채를 가지고 그리라"고(사진=김종근 교수)

쿠스타프 모로는 그에게 충고했다." 눈에 보이는 색으로 그리지 말고 상상력의 색채를 가지고 그리라"고 마티스가 야수파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니스와 파리에서 반반씩 작업을 하던 그는  ‘오달리스크’란 회교국 왕후에 딸린 궁녀를 그리기도 했는데 18세기 유럽의 엑조티시즘 회화에 나타난 이 아름다운 나부(裸婦)의 대명사는 19세기 들라크루아나 앵그르의 회화에 종종 등장했던 테마 였다.

앵그르의 ‘노예를 거느린 오달리스크’,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마네의 ‘올랭피아’의 전통적인 포즈와 작품들은 그의 누드작품과 조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름다운 나부(裸婦)의 대명사는 19세기 들라크루아나 앵그르의 회화에 종종 등장했던 테마 였다.(사진=김종근 교수)
아름다운 나부(裸婦)의 대명사는 19세기 들라크루아나 앵그르의 회화에 종종 등장했던 테마 였다.(사진=김종근 교수)

마티스는 20세기 이 주제를 편안하고 우아한 여인의 아름다운 세계로 묘사했다.

그 특유의 시원스럽고 경쾌한 색채로 많은 여인들을 그렸는데 “오달리스크는 아련한 향수, 아름다운 백일몽 마법적인 분위기에서 황홀한 낮과 밤을 보낸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실제 실내장식을 해 놓고 작업했다.

시원스럽고 경쾌한 색채(사진=김종근 교수)
시원스럽고 경쾌한 색채(사진=김종근 교수)

원색의 마술사처럼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관능적인 열정의 화풍을 보여 주었는데 물론 그의 색채와 무늬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컸다. 후에 미국에서 혹평을 듣고 타이티로 휴양 거기서 6개월간 체류했다. 그의 해초 문양의 장식들이 등장한 배경이다.

모로코 여행으로 야수파 시대와 장식적인 현란함 대신에 아라베스크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과 색의 병치로 신선함을 이룩하기도 했다.

마티스-(O) 오달리스크(사진=김종근 교수)
마티스-(O) 오달리스크(사진=김종근 교수)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피카소는 “어느 누구도 나만큼 마티스 그림을 자세히 본 사람이 없으며, 내 그림 역시 마티스가 제일 자세히 봤다”고 말한 피카소는 마티스 전시를 본 후 6개월간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경계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에는 빛을 발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앙리 마티스. 마지막 그의 예술과 사랑은 니스에서 약간 떨어진 방스의 로자리오(Rosaire) 성당 건축에서 꽃피웠다.

말년에는 “가위는 색종이보다 더 감각적이다”라고 했던 그는 말년 성당의 실내장식 일체를 맡고 병중에도 색종이를 자르고 종이를 붙이는 콜라주 작업으로 완성했다. 

마티스 예술의 집대성은 방스의 성당 장식의 마무리이다.  그 인연은 바로  처음에 그의 모든  작업을 도와준 여자 모니크 부르주아이었다 ,

마티스 예술의 집대성은 방스의 성당 장식의 마무리이다.  그 인연은 바로  처음에 그의 모든  작업을 도와준 여자 모니크 부르주아이었다.(사진=김종근 교수)
마티스 예술의 집대성은 방스의 성당 장식의 마무리이다. 그 인연은 바로 처음에 그의 모든 작업을 도와준 여자 모니크 부르주아이었다.(사진=김종근 교수)

후에 그녀는 쟈크 마리 수녀가 되어 마티스에게 성당 내외부를 디자인 해 줄것을 부탁한다.

물론 둘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후에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가 공개되어 단순한 관계는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작품은 열 두번씩이나 에스키스를 찢어내는 철저함을 가졌고, 한때 수도자가 될 생각을 가졌던 그는 세기의 ‘색채의 시인’이란 이름을 남기고 84세로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앙리 마티스는 세기의 ‘색채의 시인’이란 이름을 남기고 84세로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사진=김종근 교수)
앙리 마티스는 세기의 ‘색채의 시인’이란 이름을 남기고 84세로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사진=김종근 교수)

김종근 미술평론가 critic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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