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뭘 해도
수출 규제는 답정너
한일 관계 긴장이 필요한 아베 내각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불만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일본의 수출 규제 파동이 1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한일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와 WTO(세계무역기구) 제소 카드로 대응했다가 둘 다 쓰지 않는 것으로 성의를 보였지만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3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전화통화를 했지만 양국의 입장차만 확인했다. 

외교부 브리핑에 따르면 강 장관은 무쟁점 이슈인 코로나19 방역 협조, 수출규제 조치 완화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지만 역시 과거사 문제로 인한 앙금이 핵심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작년 11월22일 고심 끝에 두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일본 정부와 수출 규제 협상 테이블에 앉기로 합의했다. 이후 한일 무역 당국 실무진이 여러 채널로 논의를 했지만 6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우리 정부는 지난 5월12일 수출 규제를 풀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촉구했지만 3주 넘게 답변을 받지 못 했고 6월2일 WTO 제소 절차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강경화 장관과 모테기 외무상의 모습. (사진=외교부)

강 장관은 모테기 외무상에게 한국 정부의 대외무역법 개정(재래식 무기 관련 유통 규제 강화)과 두 가지 카드 철회 등 적극적인 노력을 언급하면서 일본 정부의 반대급부가 전혀 없다는 점을 항의했다. 일본 정부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으니 WTO 제소를 재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조속히 수출 규제를 거둬들이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모테기 외무상은 WTO로 가져가는 것 자체가 문제 해결에 전혀 좋을 게 없다면서 유감 의사를 표시했다. 특히 모테기 외무상은 한국으로 넘어간 수출 물자가 북한의 전략 무기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허울 뿐인 명분을 다시 환기하며 “한국의 수출관리 제도” 개선 상황을 좀 더 살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작년 7월1일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이 한국 기업에 △포토레지스트(반도체 회로패턴 그릴 때 사용) △고순도 불화수소(반도체를 원하는 모양으로 깎을 때 사용)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접히는 디스플레이에 사용) 등 3가지 품목을 수출하는 것에 좀 더 복잡한 절차를 거치도록 규제를 가동했다. 물건을 파는 국가가 사주는 국가를 상대로 갑질을 한 것이다. 나아가 8월28일에는 포괄적 무역 허가로 편의를 봐줬던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사실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밀고 있는 전쟁 가능한 정상국가 정책으로 인해 한일 무역 갈등이 벌어졌다.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자위대가 아닌 정식 군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고 긴장감을 높여서 군사적 필요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위안부, 강제징용, 학살 등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범죄 피해자들은 그 존재 자체로 아베 총리의 정상국가 전략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군대 보유의 정당성을 대내외적으로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故 여운택·신천수·김규식 할아버지 그리고 이춘식 할아버지(1924년생) 등 4명은 1997년부터 2018년까지 한일 양국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왔다. 우리 대법원은 2018년 10월30일 전범기업 신일본제철이 이들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하라고 최종 선고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법률 대리인을 통해 2019년 5월2일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 매각 명령을 신청했고 현재 그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배상판결 1년, 피해자 인권 피해 회복 요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일본정부와 가해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2019.10.30
이춘식 할아버지는 전범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베 내각은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시비를 걸고 있지만 어떻게든 긁어부스럼을 만들어야 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는 한 수출 규제는 예상된 수순이었다. 무엇보다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집행되는 전범기업(신일본제철)의 자산 매각 절차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막아서는 것은 삼권분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일 수 있다. 아베 내각은 이를 충분히 알고 있고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면서 그것을 명분삼아 수출 규제를 가했다. 

모테기 총리는 강 장관에게 “(일본제철의 한국 자산)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 관계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모테기 총리의 반응은 사실상 짜고치는 고스톱인 측면이 있다. 최대한 갈등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아베 내각의 전략상 디폴트다. 즉 일본 자민당(자유민주당)이 정권을 잃지 않는 이상 수출 규제가 풀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우리 기업의 일본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무역 의존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산화 전략에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한편, 강제 매각 관련 일본제철 및 일본 정부의 모르쇠 전략과는 별개로 최근 우리 법원은 강제 매각 절차에 돌입했다. 

피해자 변호인단은 일본제철 본사에 대법원 판결문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문전박대 당했고, 대법원도 일본 외무성을 통해 강제 압류 서류를 보냈지만 반송되거나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대구지방법원은 6월1일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 압류 명령 서류를 ‘공시송달’했다. 법원이 문서를 받아야 할 주체의 수신 불가 상태가 지속될 때 그 문서를 보관해놓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달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문서를 강제로 전달했으니 이제 일본제철의 국내 주식을 압류해서 매각(현금화)하는 집행 절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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