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피에르 레이노(Jean-Pierre Raynaud)의 심리적 오브제='화분'(1939- )
화가나 조각가로 불리길 거부했던 '레이노'...자신을 ‘20세기를 살고 있는 한 예술가’로 명명하길 주문

"만약 화분 안이 비어 있다면 그걸 여러 용도로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작품으로서 더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생활에 사용되는 물건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여기저기 다 쓰여서 너무 일반적인 것으로 전락할 테니까."

한국의 큰 은행 광고에 빨간색 화분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사진=김종근 교수)
한국의 큰 은행 광고에 빨간색 화분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사진=김종근 교수)

한국의 큰 은행 광고에 빨간색 화분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BIG POT이 그것.
그 주인공이 바로 쟝 피에로 레이노(81).
‘위험, 금지의 오브제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쟝 피에르 레이노의 작품 앞에 서면 어떤 직감적인 긴장감을 느낀다.

그 긴장감은 매우 강렬하며 정열적이고 동시에 일종의 불안감을 수반한다. 동시에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경계의식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가 일상적인 공통의 표식된 언어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1999년 파리의 쥐드폼 미술관에서 그와의 만남에서 나는 각기 다른 이질적인 종류의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사진=김종근)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1999년 파리의 쥐드폼 미술관(사진=김종근)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1999년 파리의 쥐드폼 미술관에서 그와의 만남에서 나는 각기 다른 이질적인 종류의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당신에게 있어 “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의미는? 빨강색은? 그리고 화분은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기 위해 내가 필요했던 이 몇 가지 물음은 작품이 주는 첫인상에서 비롯된다.

레이노의 작품에서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나는 것은 벽이다. 이빨이 잘 맞아 정리된 하얀 벽, 타일로 깨끗하게 붙여진 그런 벽.

그는 이 벽에 관한 작업을 1967년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벽에는 언제나 빨간색의 오브제들이 빠짐없이 붙어있었다. 이미 그 오브제의 장치는 붉은색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그는 스스로 화가나 조각가로 불리길 단연코 거부했다. 그는 자신을 ‘20세기를 살고 있는 한 예술가’로 명명하길 주문했다.

그는 집을 스스로 짓고, 부수고, 또 그 벽과 함께 또 작업한다. 1993년 그는 자신이 살았던 셀 썡 클루드의 집을 부수고 이것을 다시 천 개의 양동이에 담아 보르도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그의 오브제는 이렇게 늘 벽과 함께 다시 그의 일정한 공간 속에서 재현한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벽은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의 장이고 캔버스이고 화폭이고 무대이다.(사진=김종근 교수)
적어도 그에게 있어 벽은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의 장이고 캔버스이고 화폭이고 무대이다.(사진=김종근 교수)

그의 작품 속에 색채는 매우 강렬하다 그는 그런 강렬한 색깔을 좋아하는데 그 주요 색깔은 빨강이다. 빨강은 매우 역동적이고 정열적이며 순수하다. 그는 보여주는것 이외에 다른 일체의 상상 이미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금지를 나타내는 공통의 언어가 있다.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 색상의 일관된 차용(사진=김종근 교수)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 색상의 일관된 차용(사진=김종근 교수)

일방통행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무수한 반복과 나열, 금지 혹은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 색상의 일관된 차용 등이 그러하다.

그는 특별히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3살 때 그는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아버지는 공장의 책임자였다.

"원예학을 전공했다. 시골 정원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다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3년간 전장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너무 지쳐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았다. 1년간 병원을 다니며 치료받았다. 그때 처음 예술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인터뷰에서 )

그의 작업들이 상당 부분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연유한다고 생각하는 근거이다. 거기다 그는 누보레알리즘의 세례를 받았다. 피에르 레스타니가 주도했던 누보레알리스트를 통하여 미술에의 확신을 얻었고, 또 확신을 주었다. 그 확신은 아마도 오브제에 대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들이 오브제를 사용한 것처럼 레이노는 오브제를 과감하게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그로서는 지금 벽과 화분에 이어 새로운 작업의 계획을 하고 있지만 1960년 일찍 그는 화분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화분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무수히 나열했고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듯이 화분 작품을 선호했다.(사진=김종근)
그는 수십 년 동안 화분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무수히 나열했고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듯이 화분 작품을 선호했다.(사진=김종근)

그는 수십 년 동안 화분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무수히 나열했고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듯이 화분 작품을 선호했고 지속적으로 화분에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담아내며 작업 해왔다. 아마도 그가 그런 오브제를 선택한 것은 그가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지만 원예학교에서 전공했던 원예학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아마도 칼더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가지고 그것을 움직이고 싶어 했을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작품을 가지고 만약 몬드리안이 살아 있다면 그가 아마도 나와 같은 작품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것은 몬드리안의 지적 순수함과 회화에 대한 질서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단연코 이 레이노가 가졌던 퐁피두센터의 회고전에 절제된 순수함의 극명화는 프랑스 국기 작업으로 보인다. 그 작업들은 가장 자유성의 극대화라고 불릴만한 작업으로 그는 이 대형프로젝트들에 집중했다.

그는 국기를 통하여 보다 단순하게, 대중적이며 상징적인 오브제를 통하여 한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일상적인 오브제를 예술로 격상시키거나 승화시키는 미술세계를 우리에게 보라고 던져준다.

올 초 청담동 508갤러리에서 신작을 선보인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흑과 백의 대비, 고요라는 아시아의 가치에 큰 애착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 역시 명상적이다. 도로 표지판에 기호를 그려 넣은 '과녁' 연작도 그 연장선이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길 때, 명중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쏜다'는 행위만 남는다. 그렇기에 "과녁은 항상 당신 자신"이 된다.

"나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았다.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것은 어린 시절을 되찾는 것이었다. 모두가 자기 안의 것, 사회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것을 진실로 표현하길 바란다."라고 80대 초반의 그가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피력했다.

중국 자금성 안에, 퐁피두센터 광장에서(사진=김종근 교수)
중국 자금성 안에 작품(사진=김종근 교수)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현재 전 세계 미술관에 가장 많이 컬렉션 되어 있는 프랑스 현대미술작가로 사랑받고 있으며 중국 자금성 안에, 퐁피두센터 광장을 비롯하여 국내에도 국립현대미술관, 선재미술관 등에도 그의 작품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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