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신발을 신어야 가시덩굴 위를 걸을 수 있다. 신발을 신어야 여름날 작열하는 아스팔트 위를 걸을 수 있다. 지금 젊은이들은 모른다.우리가 일제하에서 일본식으로 만든 나무신(게다)을.

우리들 할아버지, 아버지는 현재의 신발 형태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를 오래도록 신어왔다. 그러면 그 전에는? 짚으로 짠 짚신이 있었다. 짚신 전에는 글쎄, 맨발로 다녔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는 헝겊이나 천으로 발감개를 했으리라……. 이런 신발의 변천 과정을 오늘의 세대는 모르는 게 당연하다. “송월”, “만월”이라는 표식이 명조체 인쇄로 선명히 박힌 고무신만 해도 감지덕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생산지가 군산이었던 기억이 아슴하다. 몇 해 전 단기선교 차 2박 3일 간 태국에 갔던 일이 있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자동차로 4시간을 더 들어간 고산 지역, 그곳에는 우리네가 그러했듯, 맨발로 다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맨발은 지난날의 우리를 떠오르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맑고 밝은, 그리하여 건강한 모습은 내 발을 감싸고 있는 현대식 신발이 부끄럽게 했다. 신발 하나가 나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우리네 어린 시절, 신발은 일종의 날개였다. 깨끗하고 깔끔한 신발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잔칫집에도 떳떳하게 갈 수가 있었다. 그것이 점차 발전하며 민족중흥의 시대가 오자 점차 신발은 실용성을 더하여갔다.

지금은 외국 상표가 눈에 띄는 고가의 신발을 신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때문일까, 인격이나 마음가짐과 같은 것은 신발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논밭으로, 공장으로, 거친 광야를 누비면서 살아왔다.

물론 그 예전까지 따지고 보자면 짚신에서 나막신으로, 나막신에서 검정고무신으로, 검정 고무신에서 흰 고무신으로의 변천사가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운동화에 고급 가죽신을 신기까지 거칠고 험한 세월을 건너 건너 여기까지 왔다.

닷새 만에 장이 서면 고무신 때우는 신기료 장수 옆에서 뻥뻥 수증기를 공포스럽게 내지르는 뻥튀기 소리도 요란했었다. 신발이 날개이던 세상, 운동화가 누군가의 인격을 대표해주던 세상도 흐르고 우리는 지금 험한 편리의 강을 건너고 있다.

신발은 맨발
잔디밭 위에서 돼지 오줌보에
호호 바람을 넣었지
그리하여 실로 묶었다.

축구공이 없던 시절
우리의 조상, 너희들의
조상은 축구공처럼 찼단다.
그것을 오락으로 알았지.

신발이 헤진 채
실밥이 터진 채 징검다리를 절뚝였다.

그렇게 우리는 내를 건너고 근대화‧현대화의
강을 건넜다.
이제 신발은 세종로 그 어딘가에
박물관 진열장에 있다.
검정 신발과 짚세기 두 켤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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