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방지기

이재인 전 경기대교수/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교수/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낼 모레가 되면 건넛마을 김생원 회갑 날이다. 다음 달 새 이레가 되면 순이 누나가 붉은 코 한약방집네로 시집가는 날이다. 그 닷새 후면 베트남 전쟁터에서 전투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 온 외사촌의 환영식 날이다.

이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 우리네의 어린 시절이었다. 말로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고, 입 안에 군침이 가득 고이는 말, 잔칫날.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에게 동네 잔칫날은 그야말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 할 만큼 커다란 희망이었다.

그런 날, 누구든지 잔칫집 광목천으로 만든 채일 밑으로 들어서면 먹을 것이 진창 많이 나왔다. 자디잘게 썬 실고추가 누워있는 잔치국수, 계란부침을 얇게 썰어 국수그릇 위에 포개어 얹혀진 그 잔치국수.

그 시절, 멸치 국물 냄새가 진한 국수 한 그릇은 어린 나의 혼을 쏙 빼놓곤 했다.하지만 언제나 배고픈 우리에게 그런 국수그릇 하나쯤은 코끼리 코에 비스킷이였다. 더 달라는 염치가 없어 바깥마당에 서성이다 더 줄 기미가 없으면 딱지치기, 제기차기로 시간을 보낸 우리들은 잔칫상을 차리는 과방 앞에서 얼씬거린다.

과방지기 아저씨는 우리들 속마음을 읽은 듯, 옆으로 밀어두었던 썰다 남은 떡과 과일을 누런 마분지에 눙쳐 한 보따리씩 건네주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소리도 못하고 받아든 자루의 떡과 과일을 뒷동산 펑퍼짐한 묘지 마당에 와서 펼쳤다.

나무 위에서 기름 냄새 맡은 까마귀들이 우리들 머리 위를 선회하면서 동냥을 꾸악꾸악, 구걸했다. 동네 잔칫날은 으레 주인공과 주빈이 좌상이지만 그 잔칫상 품격은 순전히 과방지기의 솜씨에 의해 좌우되었다.

솜씨 있는 과방지기는 대부분 그 마을에서 가장 솜씨 좋은 목수가 맡아 했다. 시골에서 살아온 사람일수록 잔칫상 품격을 두고 설왕설래를 하기 마련, 반상을 떠나 음식고임이 곧 그 댁의 안목과 권위라고 인정하는 게 당시 풍속의 하나였다.

이렇게 먹는 음식을 목기에 정성껏, 보기 좋게 쌓아올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솜씨 좋고 재간 있는 과방지기는 특별 초대되는 게 당시의 관례였다.

과방지기는 주빈들에게 음식을 멋들어지게 제공하기 위해 손수 준비한 목기를 가져 왔다. 그의 목기로 인해 그 잔치집의 품격은 물론, 과방지기의 실력이 동시에 발휘되는 곳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귀하게 대우했고, 그 또한 잔지집의 주인과 주빈들을 존중했다. 마음씨 좋거나 일가친척인 과방지기라도 잔칫집에 초청되는 날은 우리 소년, 소녀들이 포식하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묘지 마당에 아그덜 음성도 재갈재갈 메아리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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