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시골 소읍에 살고 있는 나의 주변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갑자기 다방(茶房)이 사라졌다. 다방 대신 ‘카페(cafe)’라는 영문자 간판이 달렸고 손님들은 같은 자리, 이름만 다른 그곳으로 들어갔다.

물론 다방에 오는 손님이나 카페에 오는 손님은 늘상 같았지만, 간판 하나로 인해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옛날의 다방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이었다.

마치 너구리굴처럼 담배 연기로 만당(滿堂)이었다. ‘금연’ 표어나 연초 ‘흡연 금지’를 알리는 경고도 없었다. 이 속에서 정치와 경제와 문학이 논해지곤 하였다.

그만큼 중요한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다방에 들어설 때면 지독한 담배연기에 곤욕을 치루곤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제는 아련하다.

농민이 쇠전에서 소를 팔아 갖고 큰돈을 헤아리기 위해서 찾는 곳 또한 다방이었다. 신식 벨벳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고 굽 높은 신발(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를 만나는 곳이 다방이었다. 맞선을 보는 곳이고 매매 흥정을 하는 곳이 다방이었다. 더러는 다방 레지 언니와 줄행랑치는 사내도 있었다. 동네에 자리 잡은 별천지, 그게 다방이었다.

우리나라 다방의 역사는 남대문역 인근에 개업한 ‘기사텐’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일본식 표기이고, 한자로 쓰면 ‘끽다점(喫茶店)’이다. 커피를 즐기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1909년 11월 3일 황성신문에 남대문역 인근에 ‘끽다점’ 개업을 알려주는 기사는 이를 증명한다.

당시 커피 한 잔 가격이 109원 5전이라고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당대의 최신 문물, 최신 시설이 다방이라 그리도 비쌌던 것일까. 당시 끽다점에는 숱한 신지식인이 모여들었고 낭만주의와 퇴폐주의에 젖은 예술인과 문인들이 진을 치기도 했다.

다방 커피의 유입은 1884년 무렵에 국내에 서구식 대불호텔, 손탁호텔이 들어옴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텔에서는 자연 커피를 내왔고, 그에 따라 끽다점과 같은 다방이 들어서 커피가 상품화됨에 따라 자연스레 대중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커피가 산업화, 일반화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격이 그러하거니와 다방의 문턱도 높아 인텔리가 아니면 그림의 떡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다방은 일반화 되었다. 우리나라 문화 예술인 덕분이었다. 일제하 속에서도 <창조>, <폐허>, <삼천리>파 문인들이 원고를 주고받고, 잡지를 편집하는 곳으로 다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방의 원조는 충무로 후타미(二見) 주변이었다. 이곳은 한일합방 이후 한국을 오가는 일본인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물 건너온 문물들이 많았고,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충무로에 가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바람을 타고 1923년 조선철도국에서 펴낸 조선 철도 여행안내는 남대문역 구내 다방의 내부 모습을 공개하여 궁금증을 해소하는 계기를 주기도 하였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 역시 당시의 다방들의 위치나 내부구조 등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동공원 주변에는 <갈채>, <서라벌>, <청동 동방살롱>을 안식처로 삼았던 숱한 문인들이 점령군처럼 진주해 있었다. 김동리, 조연현, 오영수, 박경리, 이병주, 이원수, 3대 기인으로 꼽히는 김관식, 천상병, 이현우 씨 등의 그림자가 항상 이 주변을 어룽거렸다.

예산 <호수다방>에도 한성기, 서창남, 박창식, 박병하, 김광희 시인이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20년, 카페에는 정치도, 문학도 아닌 동영상과 수다에 매진하는 이들만이 진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