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라 시인
최세라 시인

 

버리지 못한 날은 울지 못했다

최세라

 

바를 맞을 때면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순은의 점이 피부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아

 

따지 않은 사이다 병을 오래오래 흔들었다

 

그 무렵 나는 달빛공장에 다녔다

달빛을 원료로 바람과 안개를 만들었다

구름을 만들 때는

당신의 그늘을 얻기 위해 하루종일 뒤를 밟는 공정이 추가되었다

 

당신의 웃음을 원료로 달빛을 만드는 공정도 있었는데

그 공장은 먼 미래에만 있었다

 

로션을 바꿀 때가 됐어

병 속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빨리 사라지지

 

서랍을 열고 이미 지난 일을 끄집어낼 때마다

당신은 병 속으로 스며들곤 했다

 

자고 나면 별것도 아닌 어제들이 왜 베란다에 쌓이는지

묻는 날들이었다

식은 별이 손바닥에 넘쳐나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날이면

 

춤을 피할 수 없는 밤이 시작되었다

 

- 최세라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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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맛으로 사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가 느끼며 사는 모든 맛중에서도 기쁨, 슬픔의 맛과 농도도 여러 가지이며 아픔을 느끼는 통점도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건강한 맛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사는 우리네! 하지만 한 가지 잘 아는 사실은 쓴맛으로 쓰라림을 치유할 수도 있음이다. 우리는 안다. 슬픈 곡조가 슬픔의 탄식을 어루만져 주며, 눈물이 눈물을 닦아주는 명약임을... 인간, 인연, 사랑을 상실한 통증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한 때 나였던 또 다른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기 위해,(아니 상실하기 위해)수없이 미워했고 파헤치며 분노했었고 절망했던 기억을 간직했는가?그것은 두고두고 마셔야 하는 비워지지 않는 멍에의 쓴잔일수도 있음을, 흘러가다보면 어느 지점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것은 인생의 경험이 주는 교훈의 잔이기도 하다.

 언젠가 쏟아져 내릴 구름공장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했던 과거가 내게도 있었으므로 화자가 나대신 울어준 듯한 위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과감히 꺼내 정화해내는 화자는 이미 승자인 것이다. 동병상련이랄까? 유사한 과거를 가진 자만이 위 시를 뼛속으로 짜릿하게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써버린 향기로운 로션 한 병, 그 빈 병 같은 과거, 차마 버리지 못했던 이 빈 병을 과감히 버리고 새 로션을 사야지. 주름이 늘어갈 미래에는 더욱 향기 그윽하고 수분 풍부한 로션을 듬뿍듬뿍 바르며 춤을 추리라. 회한의 칼춤이 아닌 기쁨과 기대에 찬 몸짓으로 춤을... 눈물의 역설적 기능을 본다. 참는 것이 미덕인가? 아니다. 때론 목 놓아 울어볼 필요도 있다. 피 같은 눈물을 흘려본 자가 눈물을 닦아줄 줄 안다. 슬픈 노래가 진통제가 되어준 시간이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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