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가(양조장)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일제하에 이어 해방 이후 양조장을 “술도가”라 불렀다. 여기에는 부러움과 시기가 뒤섞인 시선이 담겨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이 될 만한 사업에 뒷배를 봐주는 기관까지 있으면,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친다”고 보았는데, 양조장 사업이 딱 그러했다.

우선 양조장은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었기에 부러워했다. 누룩은 아무나 살 수가 없었던 게 당시의 상황이었다. 세무서의 통제를 받았기에 술은 허가 없이 제조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밀주라는 게 성행했다.

해방 이후 농경사회에서 힘든 노동력을 보충해 술을 마시게 함으로써 잠시 고단함을 극복하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처사였다. 하지만 공업용 기계가 발달하지 않은 시골에는 사람이 손수 나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논고랑에 수로를 만들거나 산을 뭉개어 집의 터전을 만들 때도, 인력 외에는 딱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어른들의 손에는 삽과 괭이, 또는 가래가 전부였고, 노동에 지칠 때마다 어른들은 모여 술을 마셨다. 술기운에 의지에 또 한 번 힘을 북돋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힘든 농사일에는 술통과 술 주전자가 동행했다. 동네 아이들도 성인이 되면, 가장 먼저 술을 배웠다.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레 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술문화는 늙어 숨이 멎을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노동주를 마시는 일이 잦았다.

일본 유학생이나 당시의 지식인들 또한 처지가 비슷했다. 자주권을 깡그리 일본에게 빼앗겼기에 불안하고 위급한 시대, 미래도 불투명한 시기라 여기는 것이 일반이었다. 이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는 술밖에 다른 것이 없었다. 대표적인 지식인 그룹이 퇴폐적 낭만파로 불리던 문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폐허>나 <백조> 동인으로 활동한 수주 변영로, 횡보 염상섭, 오상순, 무애 양주동 시인 등이 그들이다. 수주는 여섯 살 나이부터 술독에 기어 올라가 술을 훔쳐 마셨다. 때문에 모주꾼으로 문단 역사에 기록되기도 했다.술의 역사는 이미 고려, 조선 시대 이전부터 민간에서 발효시켜 마신 일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 있다.

우리 술의 역사는 고구려 동명설화에 기록되었다. 양조법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고구려 시대 계림유사 또한 술에 대한 종류를 적어놓고 있다. 명주로서 이화주, 백주, 춘주, 천일주, 화주, 녹파주, 천금주, 초하주를 이규보가 풍류객답게 기록해 놓았다.

비록 일제 강점기 시대에 민간인의 노동력 극대화에 술을 이용한 부정적 사례는 있었지만, 술은 우리 민족의 전통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구려 시대 후부터 조선 중종 때 살았던 명기 황진이의 서사적 스토리는 술과 시에서 사대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일화가 많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술은 탁주, 소주, 청주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술은 삼고 시대부터 존재해 있었다. 술은 제천의식에 사용되었고, 고구려 시조 「주몽설화」에도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에게 술을 먹여 인연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 인번이 누룩을 빚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술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도 있다. 주선, 주당, 술꾼, 주막. 이런 용어들이 양조장과 연결된 부정적 이미지들이다. 술을 먹는 것이 퇴폐적이라 여겨졌던 것은, 사실 영국과 미국, 프랑스에서 유입되어 온 선교사들의 주장에서부터였다. 그들이 보았을 때, 술을 먹고 취하는 흥취의 삶보다는 교육과 배움을 통한 삶의 계몽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은 우리 민족과 때려야 땔 수 없는 문화가 되었다. 비록 시골 양조장이 노후 되고 퇴락하였지만 술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새로운 기계 방식과 주정 농도가 낮아진 주식회사, 술회사가 확대되었다. 지금은 대나무나 숯을 통하여 양조하여 인간 수명에 지장이 없다는 홍보까지 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