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스며든 한국 고유의 쪽빛
코로나 블루로 지친 이들에게 희망의 푸른빛으로 위로를 건넨다

[중앙뉴스=윤장섭 기자]자하미술관이 붓 대신 카메라로 그려낸 임채욱 작가의 황홀한 쪽빛 산수화 '展'을 2021년 4월 2일부터 4월 25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 설치, 스마트 LED를 활용한 영상 작품을 선보이며, 전시 주제는 ‘블루 마운틴’(Blue Mountain)이다.

자하미술관이 붓 대신 카메라로 그려낸 임채욱 작가의 황홀한 쪽빛 산수화 '展'을 2021년 4월 2일부터 4월 25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에서 개최한다.(사진=자하미술관)
자하미술관이 붓 대신 카메라로 그려낸 임채욱 작가의 황홀한 쪽빛 산수화 '展'을 2021년 4월 2일부터 4월 25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에서 개최한다.(사진=자하미술관)

전시 서문에서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신중현의 명곡 ‘아름다운 강산’을 떠올릴 만큼 가슴 벅찬 감동을 "블루 마운틴"에서 주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로 임채욱 "Blue Mountain"展은 전시장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큰 울림을 줄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출신인 임채욱은 붓이 아닌 카메라로, 수묵이 아닌 사진으로 산수화를 현대적 조형어법으로 작품을 선보여왔다.

임채욱의 사진에서 주목할 점은 기존의 사진 인화지가 아닌 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팅'을 한다는 점이다.(사진=자하미술관)
임채욱의 사진에서 주목할 점은 기존의 사진 인화지가 아닌 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팅'을 한다는 점이다.(사진=자하미술관)

임채욱의 사진에서 주목할 점은 기존의 사진 인화지가 아닌 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팅'(불용성의 안료(pigment)를 레진과 시크너(thickener)에 혼합하여 날염호를 만들어 레진이 섬유와 고착하는 방식으로 날염하는 것)을 한다는 점이다. 한지의 질감과 잉크의 스밈 효과를 활용하여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회화적 사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 작가의 이러한 작업방식은 2009년부터 전주의 한지업체와 공동으로 개발한 사진 전용 한지에 직접 프린팅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임채욱의 "Blue Mountain"은 그 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 산의 전형적인 특징인 ‘겹침의 미학’과 ‘쪽빛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 산의 고유한 가치를 찾기 위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임채욱의 《Blue Mountain》은 코로나 블루로 지친 이들에게 희망의 푸른 빛으로 위로를 건네기에 충분하다.

# 붓 대신 카메라로 그려낸 황홀한 쪽빛 산수화

필자는 거대한 한 폭의 청색 산수화山水畵를 마주하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한다. 1m 높이에 3m 길이의 긴 가로 두루마리 화선지에 그려진 일종의 ‘파노라마 산수화’...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 시리즈를 보면서 나는 신중현의 명곡 ‘아름다운 강산’을 떠올렸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들었을 때 받았던 가슴 벅찬 감동을 '블루 마운틴'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은 나에게 명작인 셈이다.

‘블루 마운틴’은 호주Australia나 자메이카Jamaica에서만 볼 수 있다고요?
그렇다! ‘블루 마운틴’하면, 흔히 호주의 블루 마운틴과 자마이카의 블루 마운틴을 우리는 떠올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주의 블루 마운틴은 고대 원시림이 남아 있는 곳으로 91종의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유칼립투스 나뭇잎의 알코올 성분이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발생하는 자외선과 만나 공기 중에 산화되면 주변 대기가 초록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보이는 프리즘 현상이 나타나 블루 마운틴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은 자메이카에서 가장 높고 장엄한 산맥으로 섬의 동쪽 1/3을 차지하고 있는데, 섬의 나머지 부분에서 당신이 블루 마운틴을 본다면, 봉우리 정상이 마치 푸른 안개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여서 블루 마운틴으로 불리게 되었다. 블루 마운틴 산비탈 아래에 자리잡은 비옥한 토양은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인 블루 마운틴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은 호주나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의 블루 마운틴을 모티브로 작업한 것이다. 산 정상이 평평한 호주의 블루마운틴과 자메이카 섬의 최고봉 블루 마운틴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산세로 이루어진 한국의 블루 마운틴과는 다르다.

임채욱이 표현한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병풍처럼 펼쳐진 산들을 중첩(重疊)시켜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을 한 폭의 ‘산수화’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블루 마운틴’은 마치 수묵의 농담처럼 다양한 농담의 블루로 표현된 산들과 첩첩산중의 산허리를 휘감은 운무를 보면서 한 폭의 산수화로 착각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회화인 산수화가 아니라 사진이다. 필자가 사진을 회화로 착각한 것이다. 임채욱은 ‘붓’이 아니라 ‘카메라’로 한 폭의 산수화를 표현한 것이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현실에서 포착한 초현실적 풍경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현실에서 포착한 초현실적 풍경(사진=자하미술관)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현실에서 포착한 초현실적 풍경(사진=자하미술관)

사진으로 산수화를 그린다? 흥미롭게도 임채욱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출신이다. 와이? 왜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수묵이 아닌 사진으로 산수화를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2009년 청화랑과 하나아트 갤러리에서 임채욱은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그는 첫 개인전에 한국화가 아닌 사진을 전시한다.그의 초기 사진인 <마인드 스펙트럼MIND SPECTRUM> 시리즈는 현실풍경에 강렬한 컬러를 접목시킨 작품이다. 임채욱은 “월천리 솔섬의 실제 보이는 풍경을 마음으로 느끼는 색으로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의 ‘월천리 솔섬’ 사진은 솔섬의 하늘과 바다를 블루나 그린 혹은 핑크로 ‘화장(化粧)’한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월천리 솔섬은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변화된다. 그의 ‘마인드 스펙트럼’은 사진으로 사진을 뒤집는 일종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고 할 수 있겠다.

2011년 임채욱은 우연히 노고단에서 지리산 종주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을 보고 충동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지리산 종주를 감행한다. 1박 2일간의 지리산 종주는 그렇게 “산(山)을 주제로 작업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 후 마치 조선시대 화가들이 발품을 팔아 산수화를 그렸듯이 그는 설악산, 북한산 그리고 지리산과 덕유산을 올라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다면 그에게 산은 무엇일까?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나에게 산은 어린 시절에는 놀이터였고, 군대 시절에는 극기 훈련장이었으며, 대학 시절에는 그림의 소재였고, 사회 시절에는 인생의 고비를 함께 넘는 동반자였다. 지금, 산은 내 작업의 화두(話頭)이자 삶의 에너지다.”

그렇다면 ’산‘은 임채욱에게 넘어야 할 ’큰 산‘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산‘은 물리적인 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산수화‘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채욱의 <설악산> 시리즈나 <인수봉> 시리즈는 주로 흑백사진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한 폭의 수묵 산수화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와이? 왜 그는 ’산‘ 사진으로 산수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일까? 임채욱은 말한다. “우리 산에는 한국의 미(美), 색(色), 선(線), 정(情), 기(氣)가 모두 담겨있다.”고...

자!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 시리즈 말이다. 길게 겹쳐진 우아한 능선과 멀리 있는 산들은 마치 푸른 바다의 물결처럼 보인다. 그의 '블루 마운틴'에는 한국의 미와 색 그리고 선과 정 또한 기가 담겨있다.

나는 사진으로 한 폭의 산수화를 표현한 임채욱의 ’현대판 산수화‘를 일종의 ’산수사진山水-寫眞‘이라 부르고자 한다. 도대체 임채욱은 '블루 마운틴'을 어디서 촬영한 것일까? 그의 말에 의하면 촬영장소는 백두대간(百頭大幹)의 중심부에 솟은 덕유산(德裕山)과 대둔산(大芚山)도 일부 포함된다.

그는 덕유산의 주봉 향적봉(香積峰)에 올라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 등의 산들의 경관을 360도를 돌면서 바라본다. 그는 1,600m 고지에서 첩첩이 겹친 중첩한 푸른 산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게 덕유산 고지에서 주변 산들은 바라보면 정말 "블루 마운틴"으로 보일까?

2009년 초겨울 임채욱은 덕유산에 올라 “그렇게 푸른 쪽빛의 산들을 처음 보았다”고 진술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추운 겨울에 만날 수 있다. 물론 그는 푸른빛이 가장 선명한 산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추운 겨울 맑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 햇빛이 산을 등지고 비추는 역광이거나 측면에서 비출 때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에만 가장 푸른 쪽빛의 산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은 마치 한 폭의 황홀한 쪽빛 산수화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덕유산 고지에서 본 '블루 마운틴'을 “실경(實景)이지만, 마치 상상으로 그린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처럼 보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까지 임채욱의 쪽빛 산수화를 기존 관념산수화에서 보지못했다. 와이? 왜 한국화가들은 그동안 쪽빛 산수화를 그리지 않은/못한 것일까?

#한지에 스며든 은은한 색과 웅장한 기운

임채욱의 대작 '블루 마운틴'은 웅장하다. 그리고 그의 블루 마운틴의 산세는 마치 범종(梵鐘)소리처럼 청아하고 맥놀이(脈動)가 길어 은은하다. 또한 그의 블루는 깊은 밀도감을 보여준다.

도대체 블루의 깊은 밀도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궁금한 나머지 그의 블루 마운틴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 인화지가 아닌 한지(韓紙)에 인화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임채욱은 한지에 사진을 인화한 것일까?

한지는 ’피부‘가 미끄러운 기존 사진 인화지와 달리 ’피부‘가 거칠어 인화하기 쉽지 않다. 한지에 사진을 인화한다고 하더라도 발색이 좋지 않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임채욱도 한지에 사진을 인화하면서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래서 그는 아예 사진을 제대로 인화할 수 있는 전용한지를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2009년 임채욱은 전주의 한지 업체와 함께 공동으로 피그먼트 프린팅을 위한 한지 개발에 착수한다. 그들은 1년 만에 잉크 막힘 문제를 해결하고 발색도를 높인 사진 전용 한지를 개발에 성공한다. 따라서 그는 2013년부터 제작된 <설악산> 시리즈와 <인수봉> 시리즈 그리고 <지리산> 시리즈 또한 이번 <블루 마운틴> 시리즈를 사진전용 한지에 직접 프린팅한다.

기존 사진이 인화지에 컬러를 ‘씌운 것’이라면, 임채욱의 사진은 한지에 컬러를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사진이 인화지에 컬러를 코팅한 것이라면, 임채욱의 사진은 한지에 컬러를 배어들게 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 점은 임채욱의 가로 ‘파노라마 사진’이 아닌 세로 ‘족자 사진’에서 좀 더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임채욱의 세로형 '블루 마운틴'으로 한 걸음 들어간다면, 당신은 우리나라 산의 ‘알몸’을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은 서예계에서 오랫동안 알려진 신(神), 기(氣), 골(骨), 육(肉), 혈(血)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것은 인체의 기맥과도 닮았다.

그렇다! 인체명당도(人體明堂圖)가 있듯이 풍수지리(風水地理)에도 명당도가 있다. '풍수지리'는 지형을 여러 각도로 해석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지형을 여러 각도로 해석한다는 것은 산수의 지세나 지형의 길흉을 판단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늘의 기(天氣)가 깃들인 땅의 기(地氣)를 파악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지리학'과 '천문학'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동양에서 땅의 기운은 하늘의 기운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운은 땅과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몸에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혈'은 인체에서 '경혈'로 그리고 '용 맥'은 '경락'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침 자리'가 바로 '경혈'을 뜻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는 명당도(明堂圖)를 땅과 하늘뿐만 아니라 인체와 서예 그리고 산수화에도 적용시켰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전경의 짙은 블루 마운틴을 본다면, 한지의 독특한 질감과 ‘골기(骨氣)’가 한 몸이 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숨 쉬는 한지의 피부에 배어든 산세는 ‘기운생동(氣韻生動)’한다는 것을 말이다. 필자는 한지에 인화된 블루 마운틴에서 산의 ‘알몸’, 즉 신, 기, 골, 육, 혈을 품은 깊은 밀도감을 드러낸다고 중얼거린 것이다.

임채욱은 한국의 '블루 마운틴'을 서구의 바탕재가 아닌 한국의 바탕재인 한지에 인화한다. 그렇다면 그는 마치 ‘신토불이(身土不二)’처럼 그림과 바탕은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화질불이(畵質不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태어난 땅에 있는 산을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으로 표현해야 잘 맞는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임채욱의 '블루 마운틴'은 호주의 ‘블루 마운틴’이나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보다 맑고 깊은 푸른빛을 지닌다. 그의 블루 마운틴의 깊은 밀도감은 필자의 마음을 맑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웅장하면서도 은은한 그의 블루 마운틴은 필자의 잡념을 떨쳐버리게 한다. 만약 당신이 웅장하면서도 은은한 그의 블루 마운틴을 보고 눈을 감는다면, 당신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의 가슴 벅찬 감동의 여운(餘韻)을 오랫동안 음미하게 될 것이다.(미술평론가 류병학의 전시서문에서)

#작가노트(임채욱)

@한지와의 인연: 내 고향은 참외로 유명한 경북 성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던 나는 작은 화실을 다녔다. 그날도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수필집 《화실의 창을 열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 담긴 ‘독수리 그림’에 매료되어 그 그림을 똑같이 모사한 것이 내가 동양화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다.

1995년 서울대 동양화과 입학하여 일랑(一浪) 이종상(李鍾祥) 선생님을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초등학생 시절 화실에서 따라 그렸던 작품집의 바로 그 저자셨다. 나는 운명적인 스승을 만나 전공 수업인 ‘회화 재료와 기법’을 가장 흥미롭게 들었다.

그 수업을 통해 한지 문화의 가치와 한지의 재료적 특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작품에 응용하는 다양한 한지 기법을 배웠다. 한지에 산수화를 그리고, 한지를 구긴 후 먹으로 산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닥종이로 입체 산수화도 만들어보았다. 한지에 대한 나의 깊은 관심은 1997년 정부가 주관한 ‘제1회 한국 인터넷 대상’에서 한지의 우수성과 가치를 담은 콘텐츠로 제작한 홈페이지 ‘한지’로 대상을 수상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스승이신 일랑 이종상 선생님께서 프랑스 문부성 초청으로 루브르박물관 내 카루젤 뒤 루브르Carrousel du louvre, 샤를 5세 전시장에서 초대형 한지 작품(6x72m)을 선보이셨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작품 영구소장 제의를 받으며 큰 호응을 얻으셨다.

@사진을 위한 한지 개발: 어느 날 대학 후배가 내 작업실로 찾아와 졸업작품 발표를 위해 한지에 사진을 프린팅해달라고 부탁했다. 후배의 요청대로 한지에 프린팅해보니 결과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기존의 회화용 한지는 질감이 거칠어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터 헤드의 막힘 현상으로 사진에 줄무늬가 생기고 발색도 좋지 않았다. 이 작업을 계기로 나는 사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전용 한지 개발을 시작했다.

2009년 전주의 한지 업체와 공동으로 피그먼트 프린팅을 위한 한지 개발에 착수 후, 1년 만에 잉크 막힘 문제를 해결해 잉크의 밀착력이 높고 발색도가 좋은 ‘사진전용 한지’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2013년부터 내가 개발한 한지에 〈산〉 시리즈를 직접 프린팅한 작품으로 발표하고 있다.

@한지의 재발견: 2015년 환기미술관에서 주최한 전시 ‘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후’ 전(展에 한지 작품으로 참여했다. 그 전시회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선생님의 작품 중 일명 ‘푸른 점화(點畵)’로 널리 알려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Where, in What From, Shall We Meet Again〉(1970) 연작과 현대 작가 11인의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그룹전이었다.

나는 북한산 인수봉과 인왕산의 산세를 담은 사진을 한지에 프린팅하고 손으로 구겨서 만든 대형 입체 작품 〈인수봉〉(215x700x15cm)과 〈인왕산〉(180x290x15cm)을 선보였다.

김환기 선생님의 푸른 점화로 그린 산과 마주 보는 위치에 내 작품이 설치되어 자연스럽게 김환기 선생님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내게는 캔버스에 그려진 푸른 점화가 일반적인 서양화와 달리 수묵화처럼 느껴졌다. 나는 김환기 선생님께서 뉴욕 시절 한지에 그리신 점화에서 그 답을 찾게 되었다.

김환기 선생님께서는 한지에 그린 점화의 느낌을 어떻게 캔버스에 표현할지를 고민하신 것 같았다. 한지의 스미고 번지는 효과를 캔버스에 옮기는 기법을 연구하셨던 것이다. 김환기 선생님께서 한지 효과를 작품에 활용하셨다는 사실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산을 주제로 사진 작업을 하는 나는 한지 효과를 작품에 활용하기 위해서 한지에 프린팅한다. 한지는 빛의 각도에 따라 종이 결이 산의 질감을 드러내고 운해를 꿈틀거리게 한다. 한지에 표현된 색감은 강하지 않아도 은은하고 그 깊이감이 느껴지며 특히 자연스럽고 거친 질감은 사진을 회화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국의 블루 마운틴: 2009년 초겨울 덕유산에 올라 그렇게 푸른 쪽빛의 산들을 처음 보았다. 내가 본 것은 실경(實景)이었지만 마치 상상으로 그린 관념 산수화(觀念山水畵)처럼 보였다. 특히 덕유산은 1,600미터 고지에서 주변의 낮은 산을 관찰할 수 있어서 첩첩산중의 산세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으로, 360도 돌면서 3개 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산 경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을 갖추고 있다.

추운 겨울 산의 능선들은 쪽빛 산수화가 되는데, 덕유산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지리산은 가장 푸른빛을 발산했다. 가장 선명한 푸른빛의 산을 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바람 불지 않는 낮은 기온의 맑은 날씨에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 산을 등지고 해가 비추는 역광이나 측면에서만 가장 짙푸른 산을 관찰할 수 있다.

대부분 한국의 전통 산수화는 바위가 돋보이는 암산을 주로 그렸다. 진경산수화에서 바위가 많은 금강산, 삼각산, 인왕산 등이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다. 그래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들도 그 산의 풍경을 주로 그리기를 반복해왔다.

한국 산의 전형적인 특징인 ‘겹침의 미학’과 ‘쪽빛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려 한 '블루 마운틴' 작업은 그동안 한국 미술사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산에 주목하고 한국 산의 고유한 가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다.

‘블루 마운틴’이라는 지명은 호주와 자메이카에도 있지만, 두 곳 모두 더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국처럼 추운 겨울의 맑고 깊은 푸른빛을 감상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한국에서만 진정한 블루 마운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 블루로 지친 많은 사람에게 한국의 블루 마운틴이 희망의 푸른빛을 선사해주기를 바라며…이(以)블루 치(治)블루!

한편 임채욱의 "Blue Mountain"展은 2021년 4월 2일부터 4월 25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에서 개최되며 오프닝은 2021년 4월 2일 오후 4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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