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모내기 하는 날은 농가에서 일종의 잔칫날이었다. 그 해 농사를 잘 지으려면 모심는 일꾼한테 배포 크게는 못할지언정 소뼈다귀 헤엄친 된장국이라도 맛있게 끓여주어야 했다.

일꾼들은 모두가 품앗이 일꾼들인데, 사실상 애송이 청년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한테 잘 먹여야 모포기를 다문다문 흙속에 지즐러 놓는다. 모 뿌리를 땅 속에 콱콱 질러대면 뿌리가 몸살을 앓게 된다.

이런 심보를 간파한 주인은 간조기도 굽고 서산 어리굴젓도 구해다 참마다 쟁반에 늘어놓는다.

“하여튼 사람이 오래 살어야 별 일 다 본다니께. 자린고비 아저씨 댁 이런 반찬 내놓으면 친정 간 며느리도 곧 되돌아오겠다…….”

구성진 입담에 너도 나도 싱겁게 웃는다. 영양실조에 누렇게 해바라기 된 총각들 진수성찬 밥 쟁반에 벙글어지는 얼굴, 오늘따라 물오른 버들가지처럼 싱싱해 보였다.

모내기 밥에 대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왔는데, 수덕사에 사는 만공이란 승려가 소위 극기시험을 해보기 위해, 아낙네를 건드렸다고 한다. 그 아낙네의 소쿠리에는 모내기 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나.

모내기 밥을 먹은 만공은 동네 총각들의 매타작도 거뜬히 이겨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희화화된 이야기가 떠돌 만큼 모내기 밥에는 민중의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새마을 사업의 촉진으로 이앙기를 수입하여, 농촌에 저렴한 값으로 보급한 일이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농촌의 손바닥만 한 다랭이 논을 제외하고, 손수 모내기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연스레 모내기할 때 필요한 도구들도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가령 모내기할 때 필요한 가늠자 못줄은 거의 쓸 일이 없게 되어, 오이가 타고 넘을 발을 엮는데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식이었다. 모내기는 수 천 년 동안 해온, 허리 아픈 노동이었다.

이제는 기계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으니, 허리 피고 살 수 있어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백년도 더 된 고목에도 봄이면 가지마다 새 이파리가 움돋는데, 모내기철이 되면 삼삼오오 허리 숙여 모를 심던 풍경이 이제는 점점 흐릿해져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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