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덩이
[중앙뉴스=이재인] 애석하게도 박정희 정권하에서 영영 사라진 귀물이 초가지붕이다. 짚을 나래로 엮고 이것을 지붕에 덮고 용고새로 꼭대기 이음매를 덮는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못하게 새끼줄을 우물정자로 가로 세로 단단히 매둔다.
각 지역에 따라 지붕의 덮개에 새끼줄을 띄는 것이 다르다. 비바람이 심한 해안지역이나 섬에서는 촘촘하게 줄을 맨다. 그것이 바람을 막는 안전장치였다. 대략 2년에 한 번 꼴로 지붕을 나래를 엮어 덮는 게 우리네 관습이었다.
이런 황금 볏짚은 소외양간이나 돼지축사 지붕 위에도 박 덩굴이 사다리를 타고 바알바알 기어오른다. 그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우리는 끝없이 기어오르는 박 덩굴을 보면서 희망의 전진을 마음에 새기곤 했다.
5‧16군사 혁명 이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초가를 슬레이트나 양철로 개량하는 운동을 억세게 밀어붙였다. 지붕 위에 박꽃이 사라졌고, 초가지붕 아래 태어났던 민초들의 혁명은 국가의 이념에 의해 숨죽여야만 했다.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냉철한 두뇌와 따스한 가슴을 가진 관리나 정치가를 기대하고 희망했다.
그런데 번번이 속는 게 국책사업이다. 초가지붕 개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모두 다’, ‘전부 다’는 민주국가에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민주국가는 다양성에 바탕을 두고 각 개성을 중시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은 농민들은 마음도 욕심도 신념도 없이 슬레이트 지붕, 양철지붕으로 ‘획기적인 혁신’을 수행했다.
그러자 내 누이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순정파 박꽃이 피어나던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박 덩굴은 높은 자리에서 정갈하게 마디마디 암꽃, 수꽃을 피어냈는데, 그 꽃들을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초가지붕에서 싹텄던 서민들의 행복은 사라졌고 도란거리는 가족들의 속삭임은 잊혀져 갔다. 우리는 영롱한 흰 빛의 박을 사랑했다.
백의민족의 혈통을 따라 자란 것인지, 박은 흰 빛을 띤 채로 쑥쑥 자랐고 바가지로, 그릇으로 무수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박꽃도 박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것을 지키고 선양하는 민속학자들의 마음이 시려온다는 말은 그냥 내뱉은 하소연이 아니리라.
무슨 일이든 참고 견디는 게 다 미덕은 아닌 것이다. 순하디 순한 농민들에게 오늘도 바가지는 이제 구경거리가 되었다.농촌의 가을 밤 풀벌레 울어 예는 밤에 박꽃은 다 잠든 가운데, 오직 홍일점이 아닌 청일점으로 하얀 가슴을 연다.
어린 박꽃은 깨끗한 선비의 꽃이요, 가녀린 여성의 살결이다. 박꽃은 아무나 손닿을 수 없는 지붕에서 고고한 이상을 잉태하면서 달빛도 별빛도 끌어안고 희디흰 천의를 펼쳐 보이는 자태에 말로만 찬사를 보내는 게 아니다.
관련기사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진수성찬에 벙글어지는 얼굴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술에 취하고 노동에 취하고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주막(酒幕)집에 날이 저무는데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소금 장수의 구령 소리가 그리워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무한천이 흘러 흘러 강으로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논다랭이 속의 보물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어메, 펌프가 사라졌다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내 맘대로 엿장수의 찢긴 날개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방 많은 거유?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참외는 속절없이 달기만 했지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먼 기억 속에 저미어오는 아픔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순이 누나 복코 형에게 시집가는 날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기억하라, ‘레위기’ 19장 9~11절을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강아지 안고 가는 여인이여 애기를 안고 가소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맨발의 청춘이, ‘검정 고무신’
- [이재인의 신농가월령가] 맨발인 누이의 빨래터는...
- [이재인의 신농가월령가] 지게...어찌 나를 잊으리오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메뚜기 있는 논에 우렁이도 있더랬어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맹도 꽁도 들을 수 없는 사막이구려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당신들의 정체를 내가 모를 줄 알고...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절구에서 정미소로의 혁명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 가마니 있으면 되는 거유?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하늘의 별이 되고 들꽃이 되었네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맨발인 어머니의 빨래터는
- [이재인 신농가월령가] 복이 가득하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