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권영옥 시인 제공
권영옥 시집/모르는 영역

 

유기난

권영옥

 

이사 온 날 풍란이 베란다 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요

연분홍이 서둘러 가버린 탓이지요만

풍란을 씻고 다듬어서 문갑 위에 올려놓고

훈김을 쐬어 주었지요

식물은 거두는 만큼 보답을 준다고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나요

풍란 줄기에서 밥풀꽃이 소복하네요

벽에 지린내 곰팡이꽃 자국들

이런 건 이제 상관없어요

이십 대의 대도회지

바람도 언덕을 넘지 못하던 길가에서

할머니가 풍란을 팔고 있었지요

햇볕 떠난 몸을 집에 데려와 옷 입히고

물을 주어 흰꽃을 다닥다닥 피웠지요

지금 밥풀꽃을 곁에 두고

밥 먹지 않아도 기억의 조각이 뚱뚱해져

와 배불러요

 

                                                - 권영옥 시집 『모르는 영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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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한편이 주는 향기가 오늘 나를 다시 도전하게 한다. 나의 유기된 풍란을 찾아 나선다. 돌아보니 저만치 시든 모습에 떨고 있는 나의 풍란이 손짓한다. ‘정성을 들이고 가꾸는 만큼 보답 받는다’는 문장은 진리다. 그렇지 못한 것도 물론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식물에 있어서만은 진리다. 화자가 담담히 써내려간 버려졌던 풍란의 재생 그리고 화사한 개화는 기울인 수고에 대한 지당한 보답이다. 여기 ‘풍란’ 대신 ‘꿈’을 혹은 어떤 ‘인연’을 대입해 본다. 살아오면서 내가 유기했던 것들을 헤아려 보자. 꿈은 아직도 꾸며 사는가? 아쉬움으로 존재하고 소홀하다가 끊어지고 잊힌 인연은 그리움과 회한이 되어 가슴 저 안쪽에서 아리게 꿈틀거린다. 회복할 수 있을까? 두꺼운 먼지를 떨어내고 다시 이어볼 수 있을까? 어리고 부족했던 나를 돌아다본다. 미숙하고 어리석어서 성취감이나 관계성이 건강하지 못했던 나 자신은 아니었던가? 버려진 풍란 같은 자아를 일으켜 세운다. 꽃향기 그윽한 시를 피워낸 시인이 꽃이다. 꽃에게 박수를 보낸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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