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예산에 잡가(雜歌)로 통칭되는 '방아타령'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와 덕을 지닌 성리학적 생활 철학을 유지해온 양반 체통에 ‘방아타령’은 저속하고 외설조라 하겠다. 그러나 가만히 숙고해보면 매우 해학적이다.

이집 쿵덕 저집 쿵덕 집집마다 새끼 배어 풍년 일세
들어 간다 봉심총각 너도 좋고 나도 좋아 쿵덕 일세
누이 좋고 매부 좋아 우리 동네 금지옥지 새끼 배네

여름 보리 타작이 끝나면 집집마다 절구통에 보리를 붓고 절구대로 쿵쿵 이리저리 대낀다. 못 먹고 기운이 딸리는 며느리나 시어머니의 얼굴에는 구슬땀이 줄줄 흐르기 마련, 이렇게 힘든 노동을 잊고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노랫가락이 오늘날 노동요로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다.

나무절구이든 돌확이든 가리지 않고 보리나 벼를 넣고 절구공이 내리꽂으면 껍질이 벗겨진다. 이렇게 거친 보리 알갱이를 초벌로 가마솥에 삶는다. 삶은 보리에 쌀이나 조 또는 밀을 섞으면 잡곡밥이 된다. 추수한 곡식을 다루는 일은 사내들보다 여인의 몫이 컸다.

이렇게 힘든 여성의 삶에 마침내 해방을 가져온 것은 근대식 방앗간, 정미소였다. 우리나라에 정미소가 처음 들어선 곳은 제물포 신흥동이라 알려져 있다. 그게 유근성 씨가 세운 정미소였다. 이때 정미소 이름은 “담송이 방앗간”이었다.영어의 ‘타운센터(Town Center)’를 우리말로 음차하여 ‘담송이’라 이름붙인 것이었다.

세계 최초로 1889년 미국에서 발명된 스팀 동력 정미기를 한국에 도입한 유근성 씨는 총 4대의 기계를 구매해 왔는데, 이로써 근방의 아낙들은 절구통 노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사용되었던 맷돌이나 독, 구유에서의 재래식 방아 찧기의 노고는 이렇게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니께 정미소 지붕 위에
초승달이 떠오르면
박꽃이 바알바알 기어오르던 초가
달달달 원동기 소리 경음으로 들리고
이산 저 산 뻐꾸기 울음이 묻히는데
보리쌀 씻는 바가지 속에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네
세상은 이생너머 저 생 서로가
추억 속에 몸을 섞었다네
초승달과 그믐달은
몇 생을 거듭해야 만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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