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 사태이후 정국은 요동치고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장장 18년이 넘는 박정희정권의 유신독재는 긴급조치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그나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마지막 숨을 거뒀다. 이 때 국민들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정권을 잡을 것으로 예상하여 이른바 3김 시대라는 명명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야당으로만 살아온 김영삼과 김대중이 하나로 뭉치면 어느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강력한 차기정권이 탄생한다고 순진하게 믿었다. 김종필은 유신정권 밑에서 총리를 역임하며 항상 박정희의 2인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두 김씨와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두환이다.

그는 시해사건의 수사본부장으로 기민하게 김재규를 체포하여 일약 명성을 날렸다. 보안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십분 활용한 그는 정국의 추이를 냉철하게 살피며 사회혼란이 가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판단되자 곧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실시라는 명분으로 제주도를 계엄권에 끌어넣는다.

이는 명백히 정권을 손에 쥐기 위한 명분일 뿐 사회혼란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태의 확대였다. 이것이 1980년 5.18이다. 전두환은 그 전에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12.12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5.18계엄확대를 발표하기 직전 김대중을 비롯한 전국의 야당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교수, 학생 등 반체제적인 인물들에 대한 일대 소탕령을 내려 내밀하게 모두 체포했다.

5월17일 밤 대대적인 불법체포작전이 전광석화처럼 전개되었다. 정치인과 종교인 등은 대부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언론인과 문인 등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그리고 학생 등은 서빙고동 보안사령부다. 필자는 유신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양일동, 장준하, 김홍일, 정화암, 김선태, 유청, 이상돈선생 등이 창당한 민주통일당 정책연구실장으로 있으면서 장준하선생의 사인규명에 온 힘을 쏟고 있었는데 5.17 밤에 술 한 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다가 찦 차 두 대에 나눠 탄 정체불명의 기관원에게 납치되었다.

그 길로 연행된 곳이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이다. 김대중을 비롯한 동교동 인사들은 모두 남산에 잡혀왔다. 우리는 우선 발가벗긴 채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꼬박 1주일동안 잠을 재우지 않으며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바깥 세상일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고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조차 모르는 지하 2층 조사실에서 다섯 명의 조사관이 번갈아가며 윽박지르는 신문에 응해야 했다. 그들이 묻는 기조는 김대중으로부터 얼마의 돈을 받아 학생들의 데모자금으로 제공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중정에 여러 차례 끌려온 경력과 전과기록을 가진 필자는 이들의 최종목표가 김대중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부인 일관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오직 혹독한 고문뿐이다. 몽둥이찜질, 잠 안 재우기, 무릎 꿇고 앉아있기, 벽면을 바라보고 손들고 서있기, 거짓말 탐지기, 전기고문 등 고문 전문가들이 썼다는 온갖 고문기법을 며칠에 한번씩 썼다. 무려 60일 동안 참혹하기 그지없는 처절한 고문 속에서 그들이 부르는 대로 신문조서를 마쳤다.

그러나 최후의 보루인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대목은 끝내 부인했다. 체포되기 전 3월 중순경에 선관위에서 주관하는 정당대표들의 동남아 각국 정당예방 행사가 있어 출국할 때 김대중으로부터 500달러를 받은 사실이 있었지만 이를 발설하면 천파만파가 될 것이 뻔한 일이어서 굳세게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정에 끌려온 지 60일 만에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때 구속영장이 정식으로 발부되었으니 60일의 고문기간은 불법으로 감금된 것인데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연루자가 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대전교도소까지 이감되어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나의 어머니는 자식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81세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대전교도소에서 듣고 단식항쟁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5.18은 정권을 잡기위해서 전두환이 꾸며낸 불장난이다. 김대중이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광주시민들이 열화같이 끓어올라 데모를 감행했다. 이를 진압하려는 신군부세력이 공수특전대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 재판을 통해서 이미 드러났다. 그런데 지만원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5.18은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한다.’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돼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됐다’는 등의 해괴한 글을 발표하여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5.18민주화운동은 법적,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이며 지씨의 비방행위는 특정인을 지칭한 것이 아니어서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상에는 북한특수군 투입을 재판부가 인정한 것처럼 엉뚱한 글발이 난무하고 있어 숭고한 5.18민주화운동정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자칫 청소년들의 역사인식에 오해를 심어줄 수도 있어 5.18단체 등의 효율적인 대처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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