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김한길 의원이 4일 '만년 비주류'의 꼬리표를 떼고 당의 중심에 서게 됐다.

지난해 6·9 전당대회에서 예상 밖 선전을 하고도,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이해찬 전 대표에게 석패한 지 1년만에 당권을 거머쥐었다.

선친인 김 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에 이은 '부자(父子) 당수' 탄생이라는 진기록도 세우게 됐다.

'전략기획통', '선거기획의 귀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서 참모형 이미지가 강한 편이었는데, 이제 자신만의 브랜드 정치를 해야할 위치에 올랐다.

1995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여자의 남자' 등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소설가 겸 TV토크쇼 진행자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15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대선 캠페인 전반을 기획,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 선대위의 미디어 선거대책 특별본부장으로 활약하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끌어내며 또 한번 '선거 기획가'로서의 명성을 입증했다.

17대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시절엔 여야간 첨예하게 맞섰던 행정중심복합도시법 통과를 극적으로 성사시켜 '협상의 명수'라는 별명을 보탰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인 2006년 1월엔 '산상회담'을 통해 사학법 문제로 장외투쟁 중이던 한나라당의 원내 복귀를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비노(비노무현) 의원들의 집단 탈당을 주도, 중도통합민주신당을 창당했으나 당시 큰 틀의 통합이 이뤄지면서 재합류했다.

이 때의 탈당 경력은 '분열의 리더십'이라는 정치적 부채를 안겨줬다.

김 대표는 17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겠다며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야인'으로 돌아갔으나, 작년 19대 총선에서는 서울 광진갑에 출마해 4선 의원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뒤 일각에서 '친노 책임론'이 불거지자 정권탈환의 견인차가 되겠다며 6·9 전대 당권에 도전했으나, 석패했다.

작년 11월엔 대선 승리를 위한 인적 쇄신을 내세우며 지도부 동반사퇴를 주장했다가 수용되지 않자 홀로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는 방법을 통해 결국 지도부 총사퇴 요구를 관철시켰다.

탤런트인 부인 최명길씨와 2남.

▲일본 도쿄(60) ▲건국대 ▲대통령직 인수위 대변인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중도통합민주당 공동대표 ▲15.16.17.19대 의원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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