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리더십'에 맥 못 춘 독일 야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현지시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CDU)ㆍ기독교사회당(CSU) 연합의 압승으로 3선 연임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오는 2017년까지 12년간 총리직을 수행하게 되면 총 11년간 총리를 지낸 영국의 마거릿 대처를 능가하는 유럽 내 최장수 여성 총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날 출구조사 결과 기민ㆍ기사당 연합의 예상 득표율은 지난 2009년에 비해 8.9% 포인트(ARD 방송사 출구조사 기준)나 증가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한 의석은 과반에 근소한 차이로 못 미치지만, 지역구 당선자가 정당득표율에 따른 배정 의석수보다 많을 때 발생하는 `초과의석'에서 선전할 경우 단독정부 운영이라는 이변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목사의 딸로 한때 동독 공산당 청년 조직에도 몸담았던 메르켈이 남성 중심인 보수정당을 이끌고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른 데 이어 3선에 사실상 성공한 것은 놀라움을 넘어 미스터리에 가깝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인 기민ㆍ기사당 연합이 승리한 원동력으로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를 돌파해낸 메르켈의 세심하고 신중한 위기관리 능력을 꼽을 수 있다.

유로존을 깨지 않으면서 그리스, 스페인 등 부채 위기국들에 긴축을 통한 재정건전성 강화에 나서도록 압박했다.

그러면서도 독일 납세자들에게는 큰 부담을 지우지 않은 것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도이치벨레 방송의 폴커 바게너 보도국장은 21일 웹사이트에 올린 칼럼에서 "유럽연합(EU)이 독일화 됐다.메르켈은 비공식적인 'EU 회사'의 회장"이라고 비유한 것은 메르켈이 갖는 유럽 내 위상을 대변한다.

지난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기민ㆍ기사당 연합이 원자력 발전소 폐기를 전격적으로 결정한 것도 이번 선거에서 여당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일본 원전 사고 직후 28%까지 치솟았던 녹색당의 지지율이 총선에서 8%대로 추락한 것은 정부의 원전 폐기 결정으로 녹색당의 존재감이 무력화됐기 때문이다.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원전 신봉자였던 메르켈이 상황이 달라지자 신속하게 노선을 변경한 것은 그의 실용주의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메르켈은 또 이번 총선 공약으로 가정복지 정책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노동권 강화에 무게를 둔 제1 야당인 사회민주당(SPD)의 특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육아 문제로 직장이 없어 연금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어머니 연금제'를 도입하기로 한 것과 탁아소 부족 문제를 공격받자 아이를 집에서 돌보는 가정에 현금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이 그 예다.

사민당과 녹색당에서 밀어붙이거나 추진할 법한 정책들을 재빠르게 수용해 이슈를 선점하거나 논란을 잠재워버리는 메르켈 특유의 순발력 있는 실용주의적 접근방법에 야권은 정책으로 차별화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바게너 도이체벨레 보도국장은 `메르켈은 비전이 필요 없다'는 글에서 "이번 총선은 비전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도 논란도 없다"고 논평했다.

독일 언론에서 메르켈의 국정 운영 스타일을 두고 '엄마 리더십'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기민ㆍ기사당 연합 청년 연맹 베를린 지부 위원장인 다니엘 키빈스키(25)씨는 연합뉴스에 "문제가 생기면 엄마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라는 신뢰감과 안정감을 메르켈로부터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 정책을 연구하는 독일의 싱크탱크인 `오픈 유럽 베를린'의 미하엘 볼게무스 소장(경제학 교수)은 연합뉴스에 "메르켈은 큰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라기보다는 단계를 밟아가는 신중하고 실용적인 지도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동독에서 성장했고 물리학자라는 개인적인 배경이 그런 스타일을 갖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경제가 유로존 재정위기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견고한 것은 기민ㆍ기사당 연합의 승리에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실업률이 통일 이후 최저 수준인 6.8%를 기록하고 있고, 물가는 안정됐으며 무역 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 규모다.

상반기 연방 정부, 기초자치단체, 사회보장보험의 수입과 지출을 결산한 결과 85억 유로의 흑자를 내는 등 재정도 건실하다.

메르켈은 총선을 2개월 앞두고 남편인 요아힘 자우어와 이탈리아 북부 산악지대인 쥐트티롤로 3주간의 휴가를 다녀왔다.

스포츠광인 메르켈은 총선 하루 전인 21일에는 베를린에서 마지막 유세를 끝내고 농구경기를 관람했다.

직설적인 페어 슈타인브뤽 사민당 총리 후보가 열을 올리면서 "동독 출신"이라고 메르켈을 공격했다가 화를 자초하는 등 번번이 말실수로 홍역을 치른 모습이 메르켈의 신중한 면모와 대조됐다.

독일인들은 메르켈의 차분하고 소탈한 '엄마 리더십'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굳이 변화의 필요성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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