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범죄, 어떤 처벌 받았나...강간? 교수형

요즘에도 주한 미군의 성범죄가 종종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한미행정협정 등에 의해 한국 국내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때마다 굴욕적인, 불평등 협정이라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조선의 경우는 어땠을까. 도리어 지금보다 더 엄정한 법의 잣대로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강간죄를 처벌한 조선시대의 법률은 모두 1367년 제정된 명나라 법인 <대명률>에 따른 처벌이었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대명률>·‘형률·범간조(犯奸條)’)
 
'강간죄'의 구체적인 처벌규정은 다음과 같다.
 
"부모상 또는 남편상을 당한 자와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와 도사(道士)·여관(女冠·여자 도사)이 간음을 범하면 범간죄에다 2등을 더해 가중처벌한다.”(<대명률>·‘거상급승도범간조(居喪及僧道犯奸條’)
 

▲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김윤보의 <형정도첩>. 성폭행죄가 바로 교형, 즉 교수형에 해당되는 중벌로 취급됐다 .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못추릴 엄격한 형벌임에 틀림없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판사(1품~3품까지의 고위직) 이자지 부부가 잇달아 사망했다. 그러자 그의 16살 짜리 딸 내은이가 삼년상을 행하려 했다. 그런데 가노(家奴)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 등 3명이 내은이를 자기 집으로 끌고가 손발을 묶었다. 내은이는 밤새도록 저항했으니 그만 힘이 빠져…"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이 사지를 서서히 찢어죽이는 극형(능지처사)을 받은 것은 상전을 겁간했기 때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성희롱도 엄한 처벌을 받았다.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한 앳된 부인이 편복 차림으로 여종을 거느리고 여종 2명을 데리고 성균관 옆 냇가를 건너고 있었다. 그 때 그곳에서 옷을 홀랑 벗고 목욕을 하고 있던 생원 최한경이 갑자기 뛰어나가 여인을 쓸어안았다.
 
부인이 완강히 항거했다. 계집종이 “우리집 안주인이시다”라고 외쳤다. 최한경과 함께 목욕을 했던 동료 두 명이 여종들을 때려 쫒아냈다.
 
세 명은 완력으로 여인을 눌러 옷을 벗기고 욕 보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부인의 입자(笠子)를 빼앗아 도망쳤다.
 
큰 일을 당할 뻔했던 여인은 사헌부에 최한경을 비롯한 유생들을 ‘강간미수죄’로 처벌해달라고 고소했다. 유생들은 단지 “희롱을 했을 뿐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사헌부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뒤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벌을 내렸다. <대명률>에 따르면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와 유배 1000리라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최한경은 강간미수와 성희롱의 경계선에서 장 80대로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다.
 
▲ 명나라군의 성범죄도 효수·참수형
 
때는 1597년(선조 30년) 8월6일 밤이었다. 덕지(德只)라는 여인이 흰 옷을 입고 시장 골목길을 지나는데 한 중국군인이 붙잡고 강간하려 했다. 여인이 끝끝내 항거하자 중국인이 칼을 빼들고 여인의 볼과 목을 찔렀다. 그 때 지나던 아이가 ‘강도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중국군인은 그 소년을 죽였다. 중국인은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파귀 유격(頗貴 遊擊)휘하의 군인이었다. 사건을 조사한 명군의 파귀 유격은 여인의 진술이 100% 맞다고 판단했다. 파 유격은 길 가던 여인을 겁탈하려 했고, 죄없는 소년까지 살해한 중국군인 이종의를 종루(종각)거리에서 목을 베었다.
 
또 있다. 1598년 8월 명나라 유정 제독을 수행한 접반사 김수가 선조임금에게 고한 내용이다.
 
“중국 군사들이 마을을 출입하면서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했으며, 심지어는 소녀까지도 강간했습니다. 이 일이 발각되자 유정 제독이 죄질이 나쁜 자들을 잡아 효수하였습니다.”
 
명의 지휘관들이 전쟁 중이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군기를 훼손하는 성범죄자들을 참수나 효수형으로 엄단했음을 알 수 있다.
 
가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여인네들이다. 또하나, ‘강간죄=교수형’의 원칙으로 엄벌에 처했던 조선시대였던데 반해, 요즘은 그냥 징역 몇 년만 살고 나오는 판국이니 조선시대보다도 더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죄질을 본다면 그냥 확 궁형(宮刑)에 처하면 어떨까. 그것이 너무 중한 처벌이라면 얼굴에 ‘난 성범죄자요’라고 새기는 자자형(刺字刑)도 괜찮을 듯 싶다.

출처:[흔적의 역사=이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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