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했던 한 사람의 일생이 조용히 막을 내렸다. 신문과 방송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음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오래 전부터 신병을 앓아온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받아드리는 분위기다.

 

그가 민주화를 위해서 싸워왔던 지난날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은 진즉부터 준비해 놨기 때문인지 차질 없이 보도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도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박근혜대통령 역시 G20에 참가하고 있으면서도 즉각 조문의 뜻을 표하고 귀국과 함께 빈소를 참배하고 영결식에도 나가겠다고 알려왔다.

 

김 전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다. 최연소 국회의원, 최 다선의원, 최연소 제일야당 총재 등등 그에게 따라 붙은 기록은 대부분 정치 분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가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최초의 문민정부를 이룩한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이 나라 민주주의 발달사에 큰 획을 긋는 대역사였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했을 때는 자유당 공천을 받았다. 이승만의 가부장적인 정치가 기승을 부릴 때 장택상과의 인연으로 여당의 공천을 받았고 무난히 당선했으나 젊은 피가 끓고 있는 김영삼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6.25의 참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땅에서 여당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거수기에 불과한 실상을 접하며 그는 과감히 자유당을 탈당한다. 촉망받는 최연소 타이틀까지 쥐어준 자유당 입장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배신의 정치’를 묵과할 수 없었다. 3대국회의원을 마치고 4대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방해를 받고 낙선한다.

 

이승만 정권은 그 후 이기붕의 승계를 목적으로 대대적인 3.15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의 궐기로 4.19혁명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물러난다. 그리고 5대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영삼은 민주당 공천으로 다시 한 번 국회에 등원하지만 1년도 못되어 5.16군사쿠데타를 맞아 국회는 해산된다.

 

김영삼의 민주화투쟁은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고 탈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5.16이후 30년에 걸친 장구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칭송과 폄훼가 엇갈린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한 가지 사실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은 돈에 관한 한 큰 욕심을 가지지 않았던 분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도 정치를 위해서 수많은 정치자금을 사용했으며 자금조달을 위해서 기업인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자금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자기 혼자서 모든 자금을 좌지우지하면 결국 부정한 자금으로 둔갑하여 말썽의 소지를 남긴다. 그렇지 않고 자금사용을 공식라인을 통하여 쓰게 되면 제 주머니를 채우는 우(愚)는 범하지 않게 된다. 내가 그의 금고지기를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자칫 어줍잖은 얘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정계일반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말하는 통설이 있다.

 

정치자금과 관련해서 항상 비교되는 인물은 김대중이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영원한 맞수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극히 대조된다. 40대기수를 내걸 때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을 나눠하기까지 오랜 세월 동지로 또는 정적으로 살았다.

 

두 분의 일생을 통틀어 본다면 아무리 미워도 동지로서 함께 살아온 세월이 더 많았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5.18학살을 자행하며 가혹한 군사독재를 펼치고 있을 때 각기 뛰어난 투쟁의 면모를 과시하며 손을 잡는다. 김대중은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고 김영삼은 연금되었으나 20일이 넘는 단식투쟁으로 캄캄한 독재의 어둠을 겨자씨만큼이라도 뚫어내는 용기를 보였다.

 

그리고 ‘85년 1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소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손을 맞잡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함으로서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되살려낼 수 있었다. 민추협이 창립된 이후 민정당 제2중대의 별명을 듣던 제일야당 민한당과의 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대승을 거둔 신한민주당의 탄생은 사실상 민추협의 작품이었다.

 

김영삼은 이 작업을 진두지휘했고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은 김상현을 대리인으로 양축을 구성할 수 있었으니 그 뒷얘기는 차치하고 겉면에 드러난 양대 진영의 협력관계는 민주화 이후 민추협이 해체되었지만 현재 사단법인으로 재 창립하여 지금까지도 친목을 도모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는 민추협의 사무총장을 맡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만족했지만 현재 여야를 막론하고 민추협동지들이 지도부를 형성하고 난마처럼 얽힌 정치판을 풀어나가고 있음은 두 분의 지도를 받았던 축적된 역량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용감하고 씩씩했던 많은 어른들이 병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세상을 하직한다. 누가 오래까지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떠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영삼은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가 남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헌신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누구도 해내기 어려운 하나회 해산, 금융실명제 실시와 같은 민주업적은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대통령을 지내신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김대중, 노무현과 함께 이 나라를 위해서 저승에서도 큰 뜻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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