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단체관람 ‘1987’
민추협 단체관람 ‘1987’
  • 전대열 大記者
  • 승인 2018.01.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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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중앙뉴스

[중앙뉴스=전대열]절에 6.25사변을 만나 피난길에도 올랐고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휴전반대데모에 동원되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일이 매일처럼 반복되었다.

 

이 때 습득한 데모솜씨를 역설적으로 대학3년 때 4.19혁명에 앞장서면서 써먹었으니 자유당정권이 데모훈련을 잘 시킨 덕분에 자유당을 타도한 학생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면서 웃을 때도 있다. 이 시절에는 학생들에게 영화 관람을 단체로 자주 시켰다. 반공교육을 위해서인지 6.25를 주제로 한 전쟁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사춘기학생들은 연애영화를 선호했으나 어림도 없었고 몰래 친구들과 어울려 극장에 갔다가 선생님에게 붙들려 매를 맞기도 했다. 내가 살던 전주에는 극장이 많았다.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가 지금 인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까맣게 잊었던 영화단체관람을 민추협에서 주관하여 여의도 CGV에서 100여 명이 함께 봤다. 화제작 ‘1987’이다. 민추협이 단체관람을 추진한 것은 6월 항쟁을 주제로 삼아서다.

 

1984년에 설립된 민추협은 앙숙처럼 대결을 멈추지 않던 세칭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힘을 합쳐 전두환의 철권독재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김영삼은 직접 나서서 망명 중인 김대중을 대리한 김상현과 손을 맞잡아 저돌적으로 민추협을 결성했다.

 

‘8512대 총선에서는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제일야당 민한당을 누르고 제일야당으로 등극하며 직선제개헌을 목표로 천만인의 서명운동을 벌였다. 대학생들은 연일 거리로 뛰쳐나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전두환정권이 믿는 것은 최루탄뿐이었다. 1987년에 들어서면서 114일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 끝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1987’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반공을 성직처럼 내세운 박처원은 고문으로 날조한 수많은 범죄자를 양산하며 기어이 일을 저지른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있었다면 죽음에 이르지는 않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세상에 폭로되기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등 언론의 힘이 크다. 고문증거를 은폐하기 위해서 시신화장을 신청한 대공분실의 요구를 과감하게 물리친 공안부장 검사 최환은 필자의 전주고2년 후배다. 그리고 교도관들의 투철한 의식이 있었기에 사건의 개요가 만천하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주인 이부영은 그 내용을 상세하게 적어 교도관 한재동에게 주면서 전직교도관 전병용에게 전해주도록 부탁한다. 전병용은 이 편지를 김정남에게 건네고 함세웅이 최종수취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담은 두 번째 편지 역시 한재동에게 줬으나 전병용은 이미 구속된 뒤였다. 전병용이 수배인사를 숨겨줬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숨어 다닐 때 노원구월계동에 있는 우리 집에 며칠 있다가 안전한 곳으로 옮겼는데 체포된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서도 전대열가에 숨었다는 얘기는 털끝만큼도 비치지 않았다. 두 번째 서신은 김정남에게 직접 연결되었고 이 때 세검정 식당에 김덕룡과 김수환추기경의 조카사위가 함께 나왔다는 것이 한재동의 증언이다. ‘1987’에서 주제로 삼은 박종철 고문치사와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사망사건은 전두환의 호헌선언에 맞선 민주항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진상의 대강은 만천하에 밝혀졌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이를 도왔던 교도관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전병용은 나중에 교도관과 정치범 사이에 얽힌 일화를 엮은 저서를 출판하여 큰 화제가 되었지만 빛바랜 사진이 되었으니 자기이름은 빼줬으면 하는 의사를 전해왔고 나는 앙꼬 뺀 빵이 무슨 맛이랴하고 답해줬다. 내가 긴급조치 국가모독 내란음모 계엄포고령 등 너절한 죄목에 얽혀 몇 차례 옥살이를 할 때 이들 교도관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다져온 지도 어느덧 40년이 넘었다.

 

그들과는 지금도 간혹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1년이면 한두 차례 전체적인 회식을 한다. 이부영 김승균 전대열 고 최동전 고 성유보 등이 자주 참석했으며 이철 문국주도 드물게 나왔다. 교도관 중에서 나장균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김재술은 진도에 귀농했다.

 

전병용은 사업수완을 발휘하고 분당에서 가벼운 소일거리 농사를 짓는다. 최양호는 사업을 하면서 기독교장로회 소속 장로가 되었고 김성열은 또래 중에서 가장 연장이어서 일찍 퇴직하고 사업의 길에 나섰다.

 

김형옥은 법무사 역할로 여러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나종남은 변호사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마라토너로 전국을 누빈다. 김영배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일하다가 퇴직했으며 최영옥은 A B두 사람인데 B의 아들 주례를 서기도 했다.

 

한재동은 ‘1987’에서 스타가 되었다고 추어주는 통에 한잔 샀다. 이들이 공무원의 신분을 무릅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정치범들과의 교유와 연락관계를 멈추지 않은 것은 부정과 부패로 물든 독재정권의 진면목을 억울하게 구속된 정치범 양심수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1987’에서 이부영이 고문내용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대공분실 조한경 강진규 두 형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구속되었을 때 이들을 회유하려는 박처원의 제안을 모두 청취한 사람이 영화에서 안계장으로 나오는 안유다. 그가 이부영에게 사실을 전해줘 세상에 알린 셈이다.

 

박종철이 죽은 후 다섯 달 만에 5.18추모식을 마치고 명동성당에서 김승훈신부가 기자회견을 열어 진상을 폭로했으며 여기서 6월항쟁의 구심역할을 했던 민추협이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 속에 단체관람을 한 것이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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