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명절 설 연휴에 가족이 함께 도보로 즐길 수 있는 서울의 유서 깊은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시는 설 연휴, 구제역과 AI 등의 안타까운 이유로 귀성을 포기한 시민들을 위해 가족이나 연인들이 함께 서울의 역사가 깃든 장소를 둘러볼 수 있는 문화·역사 탐방길 4가지 도보코스를 추천했다.

우선, 집 근처 한강을 거닐면서 만날 수 있는 문화유적 답사 코스를 추천한다. 합정역 근처에 위치한 망원정을 시작으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절두산순교박물관 2.5km 약 50여분 코스를 돌아보며, 가족과 함께 서울의 역사를 새겨보자.

합정역 8번 출구로 나와 강변북로 옆 보도를 따라 약 10여분을 걸으면 솟을대문과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은 망원정(望遠亭)으로,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가뭄에 농사를 걱정하던 세종이 이곳에 이르러 단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인 희우정(喜雨亭)이라는 편액도 같이 붙어 있다. 일제 때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88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망원정에서 양화대교를 따라 한강산책로로 내려와 10분 정도 걸으면 강변북로변에 유명한 절두산순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절벽은 원래 누에머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는데 1866년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목이 잘려 순교한 이후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우게 됐다.

박물관 야외에는 당시 천주교신자들을 고문하고 형을 집행하던 형구틀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에 귀의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된 조선 25대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의 묘비 등 45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절두산순교박물관 맞은 편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구한말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1890년 사망한 헤론(Heron J. W, 1856~1890)의 장지로 결정된 이후 고종이 이 일대를 외국인 공동묘지로 불하함에 따라 조성되었다.

연세대학교 설립자 언더우드(Underwood H. G. 1859~1916)와 배재학당과 정동중앙교회 설립자 아펜젤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Bethell E. T 1872~1909)을 비롯, 선교사와 그 가족 등 415명이 안장되어 있다.

서울 청량리역 근처 길을 걷다보면, 백성을 생각하며 정사를 고민했던 세종대왕의 업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탐방코스는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을 시작으로,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소인 숭인원을 지나 세종대왕기념관과 홍릉수목원 순으로 1.7km, 약 40분의 도보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청량리역 2번 출구 방향으로 20분을 걸으면 청량리동 영휘원(永徽園)이 나온다. 이곳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의 후궁이 된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이다.

영휘원 영내의 숭인원은 순헌귀비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아들인 이진(李晉)의 묘소로 식민치하 망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서려 있다. 1922년 일본에 체류하던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나시모토 마사코)는 당시 덕수궁에 기거하던 순종에게 8개월 된 황손 진을 소개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 이진은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하며 돌연사하게 된다. 일제가 조선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자행한 만행이라는 설도 있고, 조선황실에서 이방자 여사의 일본인 피가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벌인 일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애잔한 기분을 달래며 영휘원 영내를 빠져나오면 조선 최고의 치세를 이룩한 세종대왕의 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세종대왕기념관에는 대왕 재위 32년의 업적을 담은 그림을 비롯하여, 보물급 한글 관계 문헌 100여 종과 탁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밖에는 보물 제838호인 수표(水標)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 세종대왕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특히 수표는 조선 성종 대의 유물로서 청계천 수표교 옆에 있던 것을 복개공사 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세종대왕기념관을 나와 삼거리를 건너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목원인 홍릉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다. 1922년 명성황후의 능이 있던 홍릉 지역에 임업시험장이 조성되면서 개원했다. 면적 44만m2의 면적에 2,035종 2만여 그루가 식재된 도심의 숲을 거닐며 지친 심신을 달래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울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역사공부도 하고, 맑은 공기도 마시고, 체력보강도 하는 1석3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특히,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서울성곽길 탐방코스는 독립문과 서대문독립공원을 시작으로 인왕산국사당, 선바위를 지나 서울성곽과 안평대군집터, 석파정을 거쳐 창의문에 다다르는 도보길 3.5km, 약180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96년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였는데, 당시는 일본이나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기보다 청나라로 부터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조형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하여 전 국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독립문을 포함하는 서대문독립공원은 공원주변의 노후지역 약 3,800㎡를 편입해 독립광장을 조성하여 이곳을 찾은 시민들이 독립문을 감상하고 역사를 배우며 자연학습 체험을 할 수 있는 역사문화교육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독립문이 세워진지 112년 만에 시민과 함께 하는 역사의 성지로 거듭났다.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인왕산국사당은 무속신을 모신 당집으로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여 지금의 위치로 해체, 복원한 것이다. 지금의 위치는 국사당의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도 하다. 1925년경에 새로 지어진 국사당은 영·정조때의 건축기법을 바탕으로 원래의 국사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국사당 부근 인왕산선바위는 마치 중이 장삼(검은 베로 만들어진 품과 소매가 넓은 중의 웃옷)을 입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불교의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당시의 문신이었던 정도전과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로 크게 의견대립을 보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울성곽을 따라 인왕산 정상(치마바위)을 넘어 내려오다 보면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집터가 위치해 있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사용하던 정자인 ‘무계정사’가 있던 터로써 안평대군은 이곳에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선비들과 함께 시를 즐겼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안평대군이 커다란 바위면에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현판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석파정은 조선말기의 중신(重臣)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 후에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정문을 통과하여 정원에 들어서면 인왕산의 자연암각을 이용한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6.25전쟁이후 천주교의 콜롬바 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리는 창의문은 1396년(태조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근대문화유산의 집결지인 정동길을 걸으면,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구한말의 희망과 좌절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정동길 도보코스는 총 1.2km, 약 30분 소요되며, 환구단을 시작으로 정동제일교회를 거쳐 경운궁, 구러시아공사관, 경희궁으로 이어진다.

구한말 독립의 테마길은 환구단에서 시작한다. 1897년 고종은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환구단을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대내외에 알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1967년에는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황궁우, 석고, 삼문을 제외한 시설들이 훼손되었다.

행방불명되었던 환구단 정문은 지난 2007년 8월 강북구 우이동에서 발견되어 2009년 12월에 현재의 환구단시민공원 자리에 복원되었다.

정동길 초입에 접어들면 고딕양식의 붉은 교회당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 1858~1902)가 설립한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으로 1897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건축물이다. 도심 속 이국적인 옛 교회당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정동제일교회 맞은 편 정동극장 옆 골목으로 접어들면 경운궁(덕수궁) 중명전이 자리하고 있다. 1897년 고종의 도서관으로 건축되어 1904년 경운궁(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황제의 거처로 쓰이던 건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식민지배의 비극이 잉태된 장소이자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하고 파견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한 마지막 고심을 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작년 8월,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어 일반에 개방된 바 있다. 매일 10시, 11시와 1시 ~ 4시 정각에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단체관람이 가능하다.

정동길 중간쯤 캐나다대사관과 예원학교 사잇길 끝에는 구러시아공사관이 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2월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인데,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현재는 정동공원 내 건물의 일부인 탑만이 남아있다.

정동길 끝나는 지점의 맞은편에는 경희궁이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시절 완공되어 인조, 철종 등 10대에 걸쳐 이궁으로 쓰였으며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자랑하던 조선 5대궁의 하나였다.

그러나 경희궁도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정전(正殿)인 숭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헐려나가며 궁으로의 위상과 면모를 잃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경희궁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하여 서울시에서는 지난 1988년부터 2002년까지 복원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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