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반병률,“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8-1945)”
[단독]반병률,“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8-1945)”
  • 지완구 기자
  • 승인 2011.02.2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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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친미외교”...안창호 “실력양성”..이동휘 “무장투쟁”

초기 임시정부(임정)를 이끈 세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노동국 총판 안창호(1878-1938)였다. 이들은 임시정부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당시 임정은 ‘삼각정부’라 불렸다.

이들 세 지도자 결함은 임정이 지닌 이념적인 좌우 합작과 지역적인 연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이들 세 지도자는 출신 배경, 독립운동 노선, 활동 기반,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리더쉽 스타일등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대비되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생의 몰락한 왕족의 후예였고, 이동휘는 함남 단천의 한미한 아전 출신이었으며, 안창호는 평남 강서의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달리 이동휘와 안창호는 전통적인 차별지역인 함경도,평안도 의 평민 출신이었다. 이같은 지역적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난 민족운동 제1세대로서 어린시절 유학을 공부했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1910년 나라가 주권을 상실한 이후 이 세지도자의 세력 기반과 독립운동 노선 차이는 뚜렷해졌다.

이승만은 미국 화와이를 근거로 활동했고 미국식 공화국을 선호한 ‘친미 외교론자’였다. 안창호는 미국 서부지역을 활동무대로 삼고 역시 공화제를 선호 했으나 외교에 의한 독립 달성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전쟁 준비를 추구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북간도 지역을 지지기반으로 하였고 사회주의자로 전환한 이후에는 신흥소련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달성을 목표로했다.

정치 이념적으로 보면 이승만,안창호는 우파, 이동휘는 좌파에 속했다. 세사람 모두 주권을 찾고자 노력한 독립운동가 였지만 이승만은 권력 지향의 정치가, 안창호는 조직관리에 능한 조직가, 이동휘는 현실타파형의 혁명가였다.

1919.11.29일 이동휘가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보낸편지.(당시 임정에서 논란이 분분하던) 이승만의 독립운동노선에 대해 묻고 있다. 이들 세사람은 통합된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달리 했다.

안창호와 이동휘는 통합임정을 전폭적으로 승인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며 통합 임정에 대한 지지를 유보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 했다.

통합임정 출범 초기에 이동휘와 안창호는 동시적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11월 중순 여운형의 도일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간의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1920.1월말 한형권,여운형,안공근을 모스크바 특사로 선정한 것도 동상이몽의 결과였다.

곧 이어 이동휘와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녕, 신규식,이시영 등 기호파 총장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된다.

임정은 1920년.2.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산하의 미주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 아울러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실시해온 애국금 제도를 페지함과 동시에 구미위워부가 독립공채 발행 권한을 갖도록 했다. 이는 이동휘와 안창호에 대한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였다.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임정 대통령은 1920.12월에 상해에서 이들 환영모임에 참석한 독립운동가들(이동휘,안창호등)은 이승만이 구미위원부의 공채 발행을 통해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고 국내로부터 자금도 단절되면서,임정은 몇 달째 집세도 못낼정도의 재정궁핍 상태에 빠졌다.

재정 독점과 임정활동 부진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다고 판단한 국무총리 이동휘와 6명의 국무원 비서장.차장들은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 운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이승만의 축출과 임정 개혁이었다.

이동휘는 위임통치 청원을 골자로한 이승만 불신임 이유서와 국무총리 사퇴서를 제출하고 6.22일 북중국의 위해위로 떠났다. 김립(국무원 비서장),윤현진(재무차장),이규홍(내무차장),김철(교통차장)등도 동맹 사직을 시도했지만 현상 유지와 이승만 퇴진 불가를 주장한 안창호의 사직위협에 밀려 좌절되었다.

이동휘는 사퇴서 제출 약50여일만인 8월11일 국무총리직에 복귀했다. 이동휘가 사직을 번복하고 복귀하게 된 이유는 상해에 온 국제공산당 파견원 보이틴스키의 권고였다. 보이틴스킨은 소련정부와의 차관교섭을 위해서는 임정 국무총리명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라고 조언했던 것 이다.

이제 이동휘는 이승만과 안창호의 협력에 연연하지 않고도 모스크바 자금을 바탕으로 한 무력 양성과 소련적군과의 제휴로 일본과의 최후 결전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0년 가을 서.북간도의 한인 사회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발행한 경신참변(간도사변)은 임정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이동휘측과 안창호측은 치열한 급진론,준비론 논쟁을 교환했다.

아동휘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등 급진론과 전면적인 임정개혁을 주장했고, 안창호는 이에 맞서 실력준비론을 설파했던 것 이다.

미주로 태평양을 건너온 이승만(대통령)이 처음으로 참석한 가운데 1921.1.5일 이후 3차례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이동휘와 다른간부들 사이에 그동안 심화 되어온 노선 갈등이 분출되었다.

특히 이승만과 이동휘는 격렬한 논쟁을 주고 받았다. 이동휘는3.1운동 직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하며 대책수립을 요구했고, 대통령 1인 주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제의 폐지와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의 개혁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동휘의 공격을 무시했고, 다른 국무위원들도 이동휘의 임정 쇄신안을 반대했다.

1921.1.24일 마침내 고립된 이동휘가 임정탈퇴를 선언 함으로써 통합임정은 파국을 맞았다. 이동휘 사임은 참모총장겸 총사령관 유동열(4.15),학무총장 김규식,교통총장 남형우(4.25)의 연속 사임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5월11일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남으로써 임정은 출범1년 반만에 와해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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