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숨은 빈집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그의 상상력은 빛을 발한다.


이정진 감독의 단편영화 고스트 독립영화시사회를 3월26일(토) 늦은 7시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갖는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K(33)는 십대 소녀를 강간 살해해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범죄자다. 오랜 도피 생활 탓에 그는 지저분한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을 하고 있고, 한동안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상태다.

▲     이정진 감독
공사조차 멈춘 재개발 지역이 있다. 빈집이 즐비한 그곳에는 전주인의 흔적만 남아있다. 정지된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화면과 과거 그 자리에 머물던 사람들의 소리가 맞물려 지난 시간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수많은 빈집 중 한 곳에 K가 머물고 있다. 오랫동안 굶은 K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살점 없는 닭뼈를 빤다. K가 한쪽 구석에 잔뜩 쌓아놓은 뼈들은 어느새 인형이 돼 그를 따라다니고, 그는 창문 너머에서 마주한 소녀들과 함께 노는 상상에 빠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소녀를 강간 살해해 경찰에게 쫓기는 범죄자일 뿐이다. K는 빈집 주변을 순찰하는 경찰들의 인기척에 다시 현실을 깨닫게 되고, 점점 더 집안으로 움츠러든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방 벽에 자신의 욕망을 그리는 것뿐이다. 정작 분출이 끝난 뒤에 K에게 찾아온 것은 만족감이 아니라 불안감이다. 그는 경찰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어디론가 도망친다.

K가 사라진 뒤 페이드 아웃된 화면은 한동안 정적이 지속된다. 이어, K가 경찰에게 잡혔다는 뉴스 보도과 함께 인트로에서 보여졌던 집들이 차례로 나온다. 그곳은 피해자 소녀의 집이었고, K가 머물렀던 곳이었고, K가 소녀를 강간했던 곳이었고, 살해했던 곳이었다. 뉴스 소리가 서서히 빠지고 나면, 화면 속에 실재했던 소녀의 소리가 덧입혀진다. 지금 화면 속 그곳은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빈집이다.

이정진 감독은 지난 몇 년간 내 영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소외된 지점에 선 남자’가 등장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적은 없었지만, 여행을 마치고 나면 기억 한 구석에 그런 캐릭터들이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5년 전 작품의 주인공은 온라인 채팅을 통해 여자를 구하는 장애인 남성이었고, 댄스필름인 그 다음 영화에는 시멘트 바닥에 버려진 비닐 봉지로 분한 남자가 출연했다. 그리고 올해 초 재개발 지역으로 가득한 부산 여행을 통해 나는 빈집에 숨은 한 남자를 떠올리게 됐다.

최근 재개발 지역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의 소식이 빈번하게 들려온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 K는 뉴스 속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재개발 지역에서 한 10대 소녀를 강간 살해한 뒤,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30대 남자다. 빈집의 어둠 속에서 잠시나마 숨 쉴 여유를 갖게 된 K는 다른 세계로 빠져든 듯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이내 경찰에게 발각돼 또다시 어디론가 도망친다. 이어, 영화 후반부에는 초반부에서 보여졌던 빈집들이 다시 한 번 보여진다. 영화 속 빈집들은 주인공 K의 모델이 된 한 남자가 범죄를 저지른 현장이기도 한데,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적막감만 남은 현장에 다가가는 동시에, K의 구겨진 욕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의 지난 단편 영화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함을 가지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당부처럼 ‘알거나 이해하는 대상’을 작품으로 만든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다만, 이게 지금 이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작은 확신이 나를 이 작업으로 이끌었다.

한편 이번 작품은 장영규 음악 <황해>, <전우치>, <달콤한 인생> 외 다수 고임표 편집 <이끼>, <실미도> 외 다수와 전건익 특수효과 <헬로우 고스트>, <방자전>외 다수 박민용 시각효과 <박쥐>, <모던보이>가 특별히 맡았다

 -이 정 진 감독 프로필-

2009      베를린 탤런트 캠퍼스 수료 (베를린국제영화제)

2010      AFA 아시안 필름 아카데미 수료 (부산국제영화제)

<털장갑 속 진짜 고무> Fiction/2003/12min-4th EBS 청소년 영화제 (한국) – 가작

<뭐냐> Documentary/2004/25min -5th YMCA 청소년 영화제 (한국) – 대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Fiction/2005/12min -12th 홍콩독립영화제 (홍콩) – 심사위원 추천작 -48th 빌바오 국제영화제 (스페인) -11th 시에나 국제단편영화제 (이탈리아)-6th Short Film Festival Wie wir leben- The Way We Live Munich (독일) -2th Look and Roll Short Film Festival (스위스)

<자연의 신비> Fiction/2008/10min - 37th Dance on Camera (미국) – 심사위원대상

성미산 마을극장 : 02) 322-0345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