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시대의 여인들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남성의 뒷바라지나 하는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했다. 기나긴 겨울 밤 이불자락을 둘러쓰고 온갖 구박을 이겨내려고 서럽게 울던 여성들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을 것이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멍에 속에서 노예처럼 살던 여권이 신장되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다. 엄격한 신분제도로 사회가 굳어 있었지만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는 만민평등의 사회로 변한다.

이에 움츠리고만 살았던 여성들은 기지개를 켜고 감연히 일어난다. 각계각층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정치 분야에도 크게 진출한다. 여성 자신들이 스스로의 권리증진을 위해서 뛰기 시작하면서 숨겨져 있던 여성의 능력은 극대화된다. 특히 예술분야의 개척적인 진출은 눈부신바 있다. 6.25사변을 기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여성들도 수없이 많다. 부상자의 간호나 하던 입장에서 과감히 총을 들고 전쟁터를 달렸다.

지금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시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요즘 유난히 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신문지상으로 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윤인자는 올드팬을 제외하고는 잊혀졌던 이름이다. 윤인자는 뛰어난 미모로 관중을 사로잡았던 영화배우다. ‘빨간 마후라’등 불후의 명작에 출연했던 그는 미증유의 국난이었던 6.25를 전후하여 한국 해군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쳐 일한다. 당시 한국 해군은 모든 것이 불비한 상태였다. 미군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시기였다.

이때 맥아더 장군의 해군참모로 루시대령이 부임했는데 그가 우리 해군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해군참모총장 손원일은 그에게 미인계를 썼다. 아무 것도 없는 우리 해군을 살려낼 칼을 쥐고 있는 루시대령에게 최고인기배우 윤인자를 소개한 것이다. 민족의 자존심으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방법으로라도 많은 지원을 받아내야 했다. 윤인자는 자존심을 버리고 나라의 명령에 충실했다. 그 덕분에 해군의 시설과 훈련 등 파격적인 개선이 이뤄질 수 있었다.

윤인자는 루시의 재임기간 1년6개월 동안 진정을 다하여 봉사했다고 해서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자네는 대한민국의 꽃이네.”라는 감격스러운 호칭을 부여받기도 했다. 영화배우로 일가견을 이뤘던 윤인자가 거부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려운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그는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루시를 따랐고, 루시는 한국해군 초기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줬다. 윤인자와 루시는 비록 한국정부의 필요성에 의해서 접근했지만 후일에까지 우정과 애정을 애틋하게 남겼다.

윤인자가 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얘기를 이번에 자서전 형식의 책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를 펴냈다. 그와 함께 은막을 누볐던 신영균 등이 크게 반긴다. 윤인자는 이미 미수(米壽)를 넘긴 노배우다.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해도 신세대들에겐 낯설다. 그래서 책도 생각처럼 많이 나가진 않는 모양이다. 반면에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고위공직자들과 놀아난 신정아가 출간한 ‘4001’은 불티나듯 팔린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변양균 뿐만 아니라 정운찬의 실명도 등장하여 흥미를 돋우긴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정아가 아무리 발뺌을 해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속셈은 책을 많이 팔아야겠다는 것임이 뻔하다. 그것을 노리고 총리를 지낸 인물까지도 과감히 들춰낸 것이 아닐까. 이른바 스캔들 마케팅이다.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쳐가며 일한 윤인자의 얘기는 이미 오래전 일이라 모두 잊어버렸다. 신정아는 새롭지만 그 내용은 천양지차다. 개인의 욕구와 애국의 길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성노리개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영화배우 장자연의 편지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지만 가짜로 조사되었다. 상황설정으로 봐서 편지의 글씨는 장자연의 것이 아닐 수 있어도 그 내용만은 진짜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예계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장자연은 억울하게 숨졌다. 그의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연예기획사의 횡포와 불순한 행동은 이번 기회에 발본색원되어 우리 사회를 좀 더 맑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이들 세 사람의 한국 여인 말고 최근 숨을 거둔 리즈 테일러는 미국의 배우지만 세계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던 여성이다. 그의 연기는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세계의 영화팬들은 모두 반했다. 특히 그가 여덟 번이나 결혼을 거듭했다는 사실 앞에 최고미녀의 요염함을 그려보기도 한다. 전 세계의 팬들을 울린 리즈의 죽음이다. 이들 네 여인은 한국과 미국에서 각기 자기 삶을 살았다.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후인을 경계함이다.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점을 일깨워주고 싶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파파 할머니가 된 윤인자, ‘대한의 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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