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김규식이 시로 쓴 나라사랑
김구와 김규식이 시로 쓴 나라사랑
  • 전대열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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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뉴스=전대열 칼럼니스트]효창공원에는 김구선생을 비롯한 7의사의 무덤이 있다.

전대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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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애국열사 일곱 분을 모셨다. 김구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폭탄으로 일본을 응징했던 열혈청년 세 분이다. 효창공원은 원래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 묘를 서삼릉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공원을 만들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동물원으로 개조했던 일제의 조선 흔적 지우기의 일환이다.

이 묘역에는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 가묘도 조성되어 하루 빨리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의사의 유해 찾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효창공원은 건너편에 이화여대와 함께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요람인 숙명여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운동장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전용운동장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그 명성을 넘겼지만 아직도 축구인들은 효창운동장을 축구부흥의 실마리로 삼는다. 그 곳에 백범 김구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기념관에서는 온갖 집회가 끊임없이 열기고 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다.

10월18일 오후 가을 햇살이 따가운 날씨에 백범 김구기념사업회(회장 김형오)와 우사 김규식기념사업회(회장 이기후)는 공동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100주년을 기념하는 김구 김규식 시집 출판회를 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독립운동에 쉴 틈조차 없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책을 가까이했던 어른으로 모두 기억한다.

김구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제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수많은 중국의 각 도시를 돌며 임시정부를 옮겨 가면서도 꾸준히 백범일지를 기록했다. 옛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은 의식했던 안했던 간에 모두 시인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는 장군의 체통은 간데없고 한 인간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장군 역시 사형집행이 되기 전에 장부의 한을 남기고 떠나게 됨을 굳센 마음으로 표현하여 후세를 경계한다. 이처럼 우리의 선조들은 시인 아니면 묵객이었다. 모든 글은 먹을 갈아 붓으로 썼으니 저절로 묵객(墨客)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남긴 친필유묵은 문화재로 길이길이 남는다.

이번에 출판된 김구와 김규식의 노래는 겨레시인 성재경이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백범 김구’라는 평범한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고 우사 김규식기념사업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우사 김규식박사의 애국을 노래하다’라는 다소 긴 이름의 편저를 냈다. 김구는 일찍이 ‘나의 소원은 첫째 조선의 독립이며 둘째도 독립이며 셋째도 완전한 조선의 독립’ 이라고 절규한 바 있다. 이 말 이외에 무슨 시가 따로 필요하겠는가.

그가 하이옌의 주씨 별장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주변의 수려한 풍광을 바라보며 “산 위에서 앞을 내다보면 바다 위에는 범선과 기선들이 오가고 좌우로는 푸른 소나무와 단풍이 어우러졌다. 그 광경은 어쩔 수 없이 떠도는 자에게 슬픈 가을바람의 느낌을 가져다주었다.”고 읊은 것은 광복의 큰 뜻을 지닌 민족의 지도자도 때로는 저처럼 가슴에 저려오는 슬픔이 몰아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시인 성재경은 안창호가 김구에게 보내는 마음을 구원자라는 제목의 시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제 싸움 없는 나라로 떠나야할 시간입니다. 전 국민을 교육시켜 광복으로 나아가며, 신민회 흥사단을 만들어 독립을 가져오려고, 중국과 미국을 넘나들던 날들도 지나고, 생사의 기로에서 얼싸안던 투사들 그리운데, 선생님 영광의 그 날까지 꼭 살아남아서, 광복과 통일의 두 깃발 내가 잘 보이도록, 하늘을 향해 힘차게 흔들어 주십시오.”

안창호가 살아 있을 때에는 분단이 안 되었을 때니 “광복의 깃발만 흔들어 달라고 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필자 혼자서 웃는다. 우사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 주석과 부주석을 맡았으며 해방 정국에서도 미국과 소련의 합작으로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을 분단시키려고 획책하고 있을 때 “우리 민족끼리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이른바 남북협상을 주도한 사람이다.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북이 갈라서는 일만은 막아보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설득했으나 이미 이승만과 김일성은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남북협상이 깨지고 김구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손에 암살된 것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다.

김규식은 1950년 6.25때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병든 몸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70세의 나이로 그 해 만포진에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으며 8개 국어에 능통한 임시정부의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그가 남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시는 해방정국에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었음을 통탄하고 있어 역사를 슬프게 한다.

전대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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