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모작을 사는 사람들] 한지일의 사랑·용서·희망..“다 비우니 행복하다”
[인생이모작을 사는 사람들] 한지일의 사랑·용서·희망..“다 비우니 행복하다”
  • 신현지 기자
  • 승인 2020.09.21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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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려놓았다. 다만 옥탑방에서 한지일이 죽었다는 소리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
봉사활동 중독증...자살예방 전도사
앙드레김 10주년 추모 행사에 시니어 모델 작업 중
SNS 소통으로 위로와 용기 얻어
정상급 영화배우에서 다양한 직업의 인생3모작을 살고 있는 영화배우 한지일(사진=신현지 기자)
정상급 영화배우에서 다양한 직업의 인생3모작을 살고 있는 영화배우 한지일(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사람은 각각 제 나름의 독특한 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삶의 여정에 있어 보편적인 닮은꼴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희로애락의 굴곡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 개인사를 경험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다만, 노여움과 슬픔을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완벽하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독특한 색이 완성된다 하겠다.

70~80년대 한국영화계를 풍미하며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영화배우, 또 영화제작자로 100억대의 승승가도를 달리던 기업인. 그런 그가 어느 날 그 모든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불현 듯 인생3모작의 주인공으로, 복지 사각지대의 봉사자로 돌아와 세인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가양동 소재의 한적한 카페, 이곳에서 본지와 마주 한 인생3모작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7~80년대 대한민국 미남배우로 뭇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한지일 씨다. 첫 만남에도 그는 단박에 눈에 띌 만큼 75세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밀리터리 룩 차림으로 대중의 스타였음을 알아보게 했다.

그런 그는 자리에 앉기 바쁘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뭉뚱그려 기사를 내보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본지와의 장시간을 예고했다. 그러니 살짝 긴장이 됐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 것인지. 역시나 그는 조금도 거침없었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마당에 감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세였다.

사실 그랬다. 동네 근처의 월 100만원 수준의 세차장 알바를 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는 웃음에서 그 어떤 가식도 그늘도 감지되지 않았다. 다만 영화배우의 자존심만큼은 철저히 지키고 싶다는 그의 눈빛에 설핏 어리는 우수가 두서없는 말들에도 감정 이입되기에 충분했다. 어쨌거나 그는 시종일관 밝은 웃음으로 화려한 영화배우에서 세차장의 알바원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을 털어놓았다.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할지... 그러니까 나는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온 황해도 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유복자(1947년)로 태어났다." 어머니 혼자서 나를 키우셨지만 당시 유치원을 다녔을 만큼 나는 상당히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화배우가 된 계기는 홍콩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돌아와 우리 집 이층에 잠깐 살았던 윤일봉 선배님 영향이 아니었나 싶고. 윤일봉 선배님 영화촬영장을 따라다니며 영화배우의 꿈을 키우게 되었으니.

차정민 시니어모델과 함께  영화배우 한지일(사진=앙드레김 아뜨리에)
차정민 시니어모델과 함께 영화배우 한지일(사진=앙드레김 아뜨리에)

연예계 입문은 70년 광고 모델 데뷔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한국타이어, 양귀비 모델, 롯데백화점 전속모델로 활동했는데 열심히 했다. 71년 대학 2학년 때는 명동의 80개 좌석을 갖춘 대형 비어홀(도원)을 직접 운영했고, 72년에는 명동을 걷다 신상옥 감독님에게 길거리 캐스팅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길거리 캐스팅 1호가 되지 않나 싶다.

그때 신 감독님은 신필름 영화사를 운영하고 계셨을 때인데 영화에 관해 많은 것을 그분께 배웠던 것 같다. 첫 영화는 이유석 감독의 ‘천동’(1970)이란 작품을 한정환이란 이름으로 출연했고. 영화 주역으로 나선 건 73년 영화 ‘바람아 구름아’부터였다. 그 작품을 한소룡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는데 이때부터 내 이름이 알려지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권력의 반대 세력인 모 정치가의 집안과 친분관계가 있다는 이유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난 정치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단 친구가 좋았고 그의 아버님이 좋아 두 집안이 오랜 친분을 쌓았을 뿐인데 너무 많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영화‘천동’때는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탄압을 피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 영화부터는 쉽지가 않았다. 영화사들이 아예 나와 영화를 찍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찍은 영화는 개봉조차도 할 수 없으니 어느 감독이 나와 영화를 찍으려 하겠는가. 그때 신 감독님이 당대 최고 스타였던 홍콩 배우 리칭과  ‘반혼녀’(1973)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작품을 찍기 위해 홍콩으로 가려했던 그 마저도 갈 수가 없었다. 그 뿐 아니었다. 정작 그 분이 대통령이 된 두 달 만에 안가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팔고 다니지 않았냐며 추궁했고 아버님이라 하지 말고 대통령 각하로 부르라며 죄인 다루듯 지시하며 하대했다. 그런데도 그 쪽에서는 내게 전화 한 통도 없었다. 물론 나 역시도 그 친구를 찾지 않았고.

그런데도 속 모르는 사람들은 그 분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좋겠다고...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 내려놓았다. 용서하고 마음을 비웠다. 하지만 2015년 국외 이북도민 고국방문단에 황해도민 자격으로 초청받아 청와대를 방문하게 됐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날 내가 만찬사를 했는데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에도 그때의 기분이 상기되는 듯 그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깟 것, 이제는 과거의 한 페이지, 모든 걸 비워낸 지금의 마당인데 라는 표정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같은 정치적 탄압이 계속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군인 자격으로 다시 고국땅을 밟았다고.

“나는 군대를 두 번이나 다녀왔다. 한국에서 의가사제대로 전역을 했고, 한번은 미군(gi)으로 동두천에서 복무했다. 정치적 탄압이 심하니 미군 자격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군인 자격이라 장시간이 소요되는 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다. 대신 모델은 할 수 있었는데 앙드레김 선생님과 친분을 맺은 것도 아마 그때가 아닌가 싶다. 여원이란 잡지에 표지모델 등을 했다. 그래도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실망에 군 생활이 심드렁해져 결국 흑인상사와 싸우고 1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미국으로 들어간 그는 공장과 맥도널드 등을 전전하며 먼 이국땅에서 영화인의 꿈을 그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단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으니.

“당시 미국 이민 바람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때였다. 이두용 감독의 ‘뉴욕44번지'와 홍의봉 감독의 '캘리포니아 90006'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두 작품 모두 10만 이상의 관객으로 아주 대단한 흥행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계의 정상급 스타 자리를 차지하면서 약 40여 편의 영화를 줄기차게 쏟아낼 수 있게 되었단다. 데뷔작 김수형(74) 감독의 ‘바람아 구름아’(1973)를 시작으로 이두용(77) 감독의 ‘경찰관’(1979), ‘물도리동’(1979), 임권택(83)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8) TV드라마 ‘금남의 집’(1984), ‘형사 25시’(1988) 등. 모두 당대 극장가의 선풍적인 바람을 몰고 온 작품들이다.

특히 그는 1978년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 1979년 ‘물도리동’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 ‘아다다’의 남자주인공으로 또 모스크바영화제의 ‘아제아제바라아제’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쥐면서 미남배우의 얼굴값을 제대로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그의 영화인의 자긍심은 여전했다. 그 모든 걸 내려놔도 스타의 자존심만큼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평생 영화배우로 한지일이 기억되기를 바란다면서. “나는 지금도 여전한 영화배우다. 그거 하나만큼은 자존심으로 지키고 산다. 1세대 선배님들 도 그랬고 2세대 영화인들 역시 그렇다. 이건 영화배우의 오랜 관습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쩌다 30여개의 직업을 전전하는 떠돌이 낭인생활로 떨어져 내린 것일까. 흔히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어디 그런가. 그렇지만도 않은 게 현실인데.

“90년대 초, 영화사를 차렸다. 한시네마타운을 만들어 성인영화 약 3백여 편"을 제작했다. 에로영화 비디오계 대부라고 부를 만큼 엄청난 히트를 쳤고 그 덕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사업자를 아내 이름으로 내면서 모든 걸 다 잃었다. 아내가 벌려놓은 사채와 은행 금리가 눈덩이로 불어나고  1997년 불어 닥친 IMF로 분양과 임대도 되지 않아 그대로 100억짜리 빌딩을 날렸다.

그러니까 그가 성인영화 젖소부인 시리즈(1995년)를 제작하면서 100억대의 성공 스토리 주인공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이 모든 걸 잃고 말았단다.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 것. 충격과 좌절에 극단적인 생각을 한 것도 이때였다.

“자살을 하려고 양양 낙산사 절벽을 찾아갔다. 그런데 죽지 못했다." 자살에 실패했을 경우, 불구가 될 경우를 생각하니 차마 시도할 수가 없었다. 내려오다 후배를 만나 주유소 탱크로리에서 6개월간 일했다. 그리고 그 후 거기서 나와 베트남 하노이로 가 봉급사장을 했다. 그런데 수시로 물건을 빼내는 직원과 마찰로 그만두고 하롱베이로 가 관광객을 상대로 실크장사를 했다.

여기서도 사업 파트너를 잘 못 만난데다 공안에게 쫓겨 때려치우고 라텍스 사업을 했다. 그런데 이번엔 경쟁자의 살해위협까지 당했다. 오토바이를 탄 누군가가 내게 청산가루를 뿌릴 것이라는 그 말에 오만정이 떨어져 결국엔 베트남을 나와  LA로 갔다. 이런 이야기는 지난해 TV 인생다큐 마이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번 공개됐는데 그때 시청률을 엄청 올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튼 그런 연유에 베트남을 나와 LA로 갔던 때가 2005년인데 이때부터 미국에서 10여 년간 온갖 허드렛일로 27개 직업을 전전하며 바람처럼 떠돌았다.

왜 하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 먼 미국으로 건너간 것일까. 이 질문에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려는 표정 위로 짙은 고뇌가 어렸다. “에로영화 비디오계 대부라는 말이 너무도 싫었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우울증 공항장애까지 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미국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들을 피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뉴욕, 필라델피아, 댈러스, 애틀랜타, 텍사스, 워싱턴, 버지니아, 메릴랜드, 오하이오 등으로.”

그런 와중에도 그는 주머니만 차면 양로원과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다니며 봉사한 사실들이 국내에 알려지기도 했다는데, 그러고 보니 그는 방송인 정다빈의 죽음을 계기로 자살예방 전도사로 활동하는 것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죽은 정다빈 때문에 자살방지 전도사가 됐다. 다빈이의 유작이 된 드라마에 카메오로 등장했는데 참 명랑한 친구였다. 드라마 끝내고 2년 뒤 미국에서 그 아이의 자살 소식을 들었는데 참 안타까웠다. 그 작품이 잘 안 됐는데 아마도 그것이 우울증으로 온 모양이었다. 난 그런 기분을 충분히 알기에 마음이 더 아팠다. 설리와 구하라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프고.”

그 역시 극단적인 경험을 했던 만큼 후배 영화인들의 죽음이 남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그는 그늘진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참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천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봉사활동 중독증이라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양로원, 독거노인, 실종아동 가족 돕기, 중복장애인, 고아원 등 지금까지 그가 해온 봉사활동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라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고.

1971년 연예계 발을 들여놓으면서 시작한 봉사활동은 낭인으로 떠돌던 베트남과 미국에서도 계속 돼 국내 매스컴에 심심치 않게 올랐으니. 어디 그뿐인가. 2014년에는 자칭 ‘평창 홍보대사’로 평창동계올림픽 로고와 엠블럼을 싣고 미국 시카고, 오하이오, 메릴랜드 등지를 돌며 평창올림픽을 알렸고, 일본 대마도에 건너가 독도알림이로 왜곡된 한국의 역사를 바로 잡기에 남다른 힘을 기울인 것도 그였다. 물론 지금도 그 같은 봉사활동은 현재진행형이고. 그러니 그가 건넨 인생3모작의 명함에는 생활방편 해결과는 거리가 먼 이름들이 차지할 밖에...

그런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건 2017년 10월, ‘국외 이북도민 고국방문단’에 황해도민 자격으로 초청받아 다녀간 지 2년 만이었다. 부산국제 영화제 '신성일 특별회고전' 참석을 계기로 일시 귀국한 그에게 지인들은 미국에서 그만 떠돌고 한국에 정착할 것을 극구 권유했다고.  

인생 후반기를 훌쩍 넘은 그 역시 고국이 그리운 건 당연했을 테고. 하지만 홀로서기 고달픔은 서울도 마찬가지, 직업을 구할 수 없어 사람 만나기를 기피했단다. 결국은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결심과 함께 호텔 웨이터, 벨보이, 발렛파킹 요원 등등 임시 고용직을 돌면서 이제는 어떤 형태의 일이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긍정마인드가 됐다고.

"다 내려놓고 비우니, 그냥 행복하다. 사람을 만나면 밥 사줄 정도의 여유는 되는데 무슨 걱정이겠나" 

하긴, 최고 정상에서 굴러 바닥을 치고 일어났으니 왜 깨달은 바가 없겠는가. 그래도 가장 겁이 나는 건 있단다. 그 어떤 직업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날이 올까봐 그게 겁이 난단다. “한지일이 옥탑방에서 죽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 핸드폰에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한 여인의 사진이었다. 오래 전 자신이 떠나보낸 사람이라고. 자신의 형편이 이래서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가 가정을 가지고 있을까봐 차마 연락은 할 수 없다고.

문득 그에게서 애써 누른 외로움이 감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 나름의 외로움은 있는 것. 이 외로움을 그는 SNS의 2천5백명의 페친과 소통으로 위로와 힘이 되고 있단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극복도 페친들 도움으로 완치될 수 있었고, 전철역에서 페친이 자신을 알아보고 뛰어와 파이팅을 외칠 때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운이 난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앙드레김 10주년 추모 행사에 시니어 모델로 런웨이 준비 중이라며 눈빛이 반짝였다. “코로나 때문에 행사가 현재 잠정보류상태이긴 한데 기대가 크다. 특히 앙드레김 선생님과는 아주 오랜 친분이 있었던 것이라 시니어모델 데뷔를 선생님 추모 10주년 행사에서 할수 있다는 게 매우 의미 있고 뜻 깊다.”  

최정상급 영화배우에서 내려와 그 모든 걸 훌훌 털고 자유인으로 인생3막을 살아가는 영화배우 한지일. 영원한 영화배우로 남기를 희망하는 그가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며 성큼 카페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신중년의 3모작에 대한 기대가 한층 더 커졌다.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많은 관심과 응원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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