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 당시 황용사의 격이 경주지역 내 주요 사찰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았던 것

[중앙뉴스=경주시, 박미화 기자]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제정스님)는 경주 황용사지에 대한 조사성과 공개 설명회를 22일 오후 2시 경주시 황용동 황용사 발굴터에서 개최했다.

중심사역 전체 전경  (사진=경주시 제공)
중심사역 전체 전경 (사진=경주시 제공)

경주 황용사지에서는 2018년부터 올해까지 3년에 걸쳐 시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번 조사는 중심사역 서쪽구간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조사결과, 서탑을 중심으로 회랑, 건물지, 석축, 석렬, 진입부 등 많은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지난 조사에서 확인되었던 투조 금동귀면이 추가로 2점 더 출토되었고 이와 더불어 금동보당 당간과 기단, 금동불상 대의편, 금동사자상, 금동연봉, 금동촉대 받침 등 금동제 유물 20여 점이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투조 금동귀면은 지난조사에서 확인된 금동귀면과 비슷하지만 크기나 수염, 귀모양 등이 조금씩 다른 형태이다.

금동촉대 받침  (사진=경주시 제공)
금동촉대 받침 (사진=경주시 제공)

금동보당 당간과 기단부는 지금까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적이 없다. 이번 황용사지에서 처음 확인되었는데,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가장 큰 보당이다.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보당과 비교하면 리움미술관 소장품이 73.8㎝인것에 비해 황용사 출토 금동보당은 잔존해 있는 당간부와 지주부만 110㎝로 대형이며, 시기도 황용사 당간이 앞선다.

금동불상 대의편은 직경 30㎝가 넘으며 전체 비례로 볼 때 약 1m 이상의 대형 금동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사자상은 2점이 출토되었다. 크기는 약 17㎝정도이고 앞, 뒷다리를 쭉 뻗어 무엇인가를 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분황사, 용장사 출토품과 유사하며 주로 촉대나 광명대를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금동연봉, 금동촉대받침 등 다양한 금동제 유물이 확인되어서 창건 당시 황용사의 격이 경주지역 내 주요 사찰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았던 것을 보여준다.

황용사지 출토사자상 받침 추정  (사진=경주시 제공)
황용사지 출토사자상 받침 추정 교정안 (사진=경주시 제공)

불교문화재연구소는 2013년부터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지원을 받아 전국의 (비지정)폐사지를 대상으로 ‘중요 폐사지 발굴조사사업’을 매년 진행하고 있다. 이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경주 황용사지에 대한 시굴조사를 시작하여 올해까지 매년 추정사역 및 중심사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왔다.

경주 황용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며 경주 보문단지에서 감포 방면으로 넘어가는 동대봉산(옛 은점산) 절골에 위치하고 있다.                

금동제 유물 일괄  (사진=경주시 제공)
다양한 금동제 유물과 석불, 소조불, 용두편, 쌍조문 암막새 등 희귀한 유물이 출토 (사진=경주시 제공)

지금까지 조사결과, 황용사는 계곡을 따라 다단의 석축 대지를 축조한 후 상면에 건물들을 조성했던 산지형 가람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번창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중심사역에는 쌍탑과 금당지를 비롯한 회랑과 축대, 석렬, 배수로, 소성유구 등 다양한 유구들이 중복되어 확인되고 있으며, 투조 금동귀면을 비롯한 다양한 금동제 유물과 석불, 소조불, 용두편, 쌍조문 암막새 등 희귀한 유물이 출토되어 황용사에 대한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따라서 경주 황용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금속공예기술과 건축기술이 집약된 유적으로 확인되며 이번 발굴조사 성과는 고고학적 쾌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황용사지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 정비, 복원 등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경주지역 대표 불교문화유적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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