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는 우리 국군 조직 중 어떻게 보면 이단아에 속한다. 분명히 바다 해(海)자가 들어갔으니 해군 같은데 해군의 이미지와는 복장부터 다르다. 해군은 하얀 군복에 비뚜름하게 머리에 얹혀있는 하얀 모자가 상징이다.
 
어깨를 덮는 커다란 칼라가 달려있어 정복으로만 치면 어떤 사립초등학교 교복 같다. 이에 반해서 해병대는 육각인지 팔각인지 모르겠지만 각이 진 모자에 빨간 명찰을 달고 있어 금방 구별이 된다. 같은 해(海)자가 붙어있는데 어째서 다른 군대가 되었을까. 그것은 6·25동란을 계기로 미군의 군대체제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미국 해병은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군대로 용맹을 떨친다. 상륙작전만을 위한 군대로 해병대를 양성했다.

상륙작전이란 적군의 허리를 두 동강이 내는 전투다. 군대편제는 최일선 부대가 가장 앞에 서고 이를 지원하는 부대가 바로 뒤를 따른다. 그들은 식량과 군복 그리고 탄약을 지원한다. 그리고 후방부대는 멀리 뒤떨어져 있으며 언제든지 일선에 투입될 수 있도록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투입되어 있는 최일선 부대가 이들 후방지원부대의 보급을 받지 못하면 고립되고 만다. 탄약도 떨어지고 식량도 없으면 전투는 해보나 마나다. 고립무원에 빠진 군대는 곧바로 패잔병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전투부대 못지않게 중요한 부대가 지원보급부대다. 전쟁을 수행하는 노련한 전투지휘관은 이를 노린다. 최일선에서 아군을 공격하는 전투부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립시키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상륙작전의 가장 큰 목표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보급과 지원을 끊어 전쟁을 승리의 전기(轉機)로 만든 게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젠하워에 의해서 단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이로 인하여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자랑하는 독일의 롬멜은 그 명성을 잃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연달아 백기를 들어야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더 유명한 게 맥아더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다. 노르망디에 비해서 인천상륙작전은 훨씬 어려운 작전이었다. 우선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만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상륙정이 곧바로 해안까지 들어갈 수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이어야 했다.

월미도 등대를 훤히 밝히지 않고서는 250여척에 이르는 상륙정이 돌진해야 할 목표를 찾기 어렵다. 이 고난을 뚫을 특공대 6명은 한국군과 미군 각 3명이 차출되었다. 이들 중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분은 KLO부대장 최규봉 뿐이다. 그들은 월미도 등대를 찾아 천신만고 끝에 등대를 점화하는데 성공한다. 원양에 머물며 등대불이 켜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는 드디어 상륙을 명령한다.
 
이때 동원된 부대는 미국의 해병대가 주축을 이뤘으며 한국의 해병대도 당당히 합세하여 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이루는 것이다. 인천은 서울과 지근거리다. 1950년 9월 15일 상륙을 단행한 한미연합군은 시가전을 치르며 곧바로 서울로 공격의 총구를 겨눴고 9월 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는다. 이 작전으로 인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던 인민군은 지리멸렬 패잔병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으로 버티게 된다.

이 모든 작전의 중심에 해병대가 있다. 해병대는 여러 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수가 많다. ‘귀신 잡는 해병’과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용감성과 단결력의 상징으로 해병을 찬양하는 말이다. 해병대 출신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병대를 낮춰 부르는 말 중에는 ‘개병대’도 있다.
 
해병대원 중에서 아무데서나 주먹을 휘두르고 술주정이 난잡한 사람들이 있어 얻은 별명이다. 같은 군인이면서도 해병 몇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군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해병대의 기세는 군인의 숫자를 괘의(掛意)하지 않고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러다보니 행패 또한 심했다. 걸핏하면 주먹다짐이요, 주사 부리기였다.

해병대 내부에서 이를 조장한다는 말도 들렸다. 소수지만 단결력 하나로 군대 내에서 타군을 눌렀다. 사회에서의 행패도 컸다. 그래서 ‘개병대’로 불렸지만 근래에는 전연 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탤런트 한 사람이 뒤늦게 해병에 입대하자 느닷없이 3배의 지원병이 몰려들었다.
 
연평도 폭격에 희생된 해병 두 사람은 영웅처럼 치켜졌다. 해병대 최고의 해가 될 뻔 했던 이 시점에 여객기를 향해서 발포한 해병이 나오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동료 네 사람을 쏴 죽이는 해병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해병대의 독특한 사기 진작 전통이 빚어낸 최악의 사건이다. 사회는 일취월장 발전하고 있는데 해병대만은 50년 전통(?)이랍시고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번 기회에 확 뜯어고치지 못하면 언제 또 다시 ‘개병대’가 될지 모른다. 자랑스러운 해병대의 전통은 국민과 함께 가는 길임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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