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신현지 기자]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5년, 베트남전의 비극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는 장편소설 ‘붉은 눈동자’가 지난해 12월 출판 이후 꾸준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갈등이나 분열, 비판이나 고발이 아니라 위로와 치유로 함께 어우러지는 따뜻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감추고자 했던 베트남전쟁의 진실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자들의 노년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데뷔작 ‘탄흔(彈痕)’과 장편소설 ‘황색인’ 등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시대의 저편에 웅크린 아픈 상처를 치유해온 작가는 ‘붉은 눈동자’를 통해서도 화해와 사랑, 용서를 인간의 염치와 예의라는 양심으로 모색해 나간다. 탄탄한 문장으로 폭력적인 역사 속의 인간 존재의 비극에 대해 꾸준히 얘기해온 작가는 선악 갈등이나 대결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를 모색하고 있다.

전쟁판에 나갔다가 육신이 망가지거나 성해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해도, 지난 반세기 동안을 일그러지고 뒤틀린 채로, 그렇게 죽거나 늙어온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그때의 일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월남전쟁은 한국에,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특히 참전군인들에게는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 의미와 그 무엇을 혼자서라도 바로 정리하고 싶었다.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할 것도, 더욱이 원망하거나 화를 낼 것도 없다. 그 길이 우리의 입장과 처지에서 선택한 최선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진실이 가려진 역사는 죽은 역사라고 믿는다. 살아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현재와, 죽어서 조용히 묻혀 있는 역사가 어찌 대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내가 이 소설을 쓴 이유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폭력적인 역사 속의 인간 존재의 비극에 대해 꾸준히 탐구해온 저자는, 분출하는 이야기의 힘과 탁월한 구성력으로 시대의 세태를 뿌리 깊고 폭넓게 파고드는 리얼리즘 소설의 대가로 불린다. 따뜻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함께 사는 인간들의 예의와 양심 그리고 사랑을 그려온 이상문 작가는 월남에 2년 6개월간(1970~1972) 파병되어 군복무를 한 참전용사다.

바로 조금 전까지 함께 웃던 전우의 살덩어리가 폭발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쓰러져가는 적들과 자신이 겨눈 총구가 사람을 넘어뜨리는 아비규환의 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며 황폐해진 젊은이들. 육신과 영혼이 온통 절망과 분노로 얼룩진 채 살아 돌아온 이들은 어떻게 치욕을 견디며 고통스럽게 삶을 버텨왔는가. 

‘붉은 눈동자’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 젊은이가 수색중대 병사로 최일선에서 싸운 전쟁의 이야기다. 이에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인 황덕수와 상대역인 구종구, 그리고 두 사람을 중재하는 정미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거기에 월남전 당시 베트남의 청순한 여고 3년생이었던 티엉마이와 전우 엄종철, 그리고 주인공의 회사 동료 독신녀 김하나가 등장한다.

펄프 제지 관련 오퍼상을 31년째 꾸려오는 황덕수는 6·25 와중에 남편을 잃고 재혼한 어머니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다. 대학 시절, 날마다 시위에 나서야 하는 학교 생활에 염증을 느껴 자원입대했다. 베트남 파병도 자원해 수색 중대에 배치됐다. 거기서 위문편지와 답장을 주고받은 정미연과 제대 후에 결혼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성(性) 부전증을 앓아 아내와의 잠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

황덕수와 같은 수색 중대에서 전투를 벌였던 구종구는 6·25로 인해 부모는 물론 지리산 피아골 집성촌 사람들이 거의 다 죽은 고아 출신. 제화공으로 일하다가 초등학교 중퇴라는 학력을 속이고 입대해 참전했다. 무방비의 베트콩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악마성,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챙기려 하는 탐욕적 행태 등으로 황덕수가 적의를 품게 되는 비열한 인물이다.

대학 재학 중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 돌아와 제대한 황덕수와 결혼, 전공했던 피아노를 학원에서 가르치며 가난한 신혼살림을 꾸려간 정미연. 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남편의 성부전증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도 순종적인 아내의 표본처럼 갈등을 인내하던 정미연은 당뇨병과 우울증으로 3년 전 소양강 다리 위로 차를 몰아 강물 속으로 돌진해 자살하고 만다.

그런 정미연이 3년 탈상을 마치자마자 ‘그 남자’인 남편 황덕수 꿈속에 찾아오며 스토리는 전개된다. 남편의 꿈속에 나타난 아내 정미연은 그 남자가 떠올리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과거 전쟁터의 아픈 기억을 소환하며 수색중대에서 벌어졌던 진실을 추궁해나간다. 그와 함께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인물인 구종구에게서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죽기 전에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서 소설은 40여 년 전 베트남 전장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황덕수와 구종구를 내세워 베트남전의 실상과 의미를 되새기고 매일 찾아오는 정미연을 통해서는 부부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간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 한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는 해주는 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 휴머니즘을 입장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전쟁의 후유증을 해원하고 진정한 관계로 발전돼 나갈것을 기원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위로를 받을 길 없는 희생은 시시때때로 삶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며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되살려낸다.

더불어 작가는 여러 각도에서 깊이 있게 파고든 ‘붉은 눈동자’를 통해 고엽제 후유증 등으로 시달리며 늙어가는 동료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처절하게 싸운 그 베트남전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를 참전용사로서 묻고 있다.

여기에 ‘붉은 눈동자’는 인간의 예의와 자존을 다시금 생각게 한다. 일상 중 우리가 무심코 지나졌던 아니면 시시콜콜 말하지 않고 넘어갔던 삶과 인간의 깊은 곳을 조명하며 시대의 저편에 웅크리고 있는 아픈 상처를 향해 지유와 용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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