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변화와 현실의 비애 함께 느껴-

철기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광복청년 아카데미’가 앞장 선 독립군 유적지 탐방단 87명이 3천킬로의 대장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금년으로 여섯 번째를 맞이한 이 행사는 정준 사무총장의 진두지휘 하에 국방부, 육군대학, 대덕대학, 충남대 등 계룡대와 자운대 멤버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행사의 기본 목적은 진리탐구에 열중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선열들의 유적지를 탐방함으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있다. 나라를 빼앗긴 분노를 되새기고 처절한 항쟁을 통하여 어떻게 민족의 기상을 빛냈는지 현장에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철기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별도로 광복청년 아카데미를 조직하여 이 활동을 전개해 왔다.

금년에는 7월17일 방화동 국제청소년센터에 전원 집합하여 사전 오리엔테이션을 갖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오후 내내 상견례를 나누고 주의사항을 들은 후 광복청년의 노래를 김옥순 음악강사의 지휘로 배웠다. 오영숙 전세종대총장은 중후한 인품의 강연을 통하여 유적지를 찾는 대학생들의 올바른 자세를 가르쳤다.

탐방단 일행은 7월18일 국립 현충원에서 서영훈회장께 출국신고식을 치른 후 무명용사의 탑에 참배했다. 철기장군의 묘소를 참배한 탐방단은 6.25전사 장병 유해발굴단을 방문하여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유해발굴에 대한 관계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말로만 듣던 유해를 직접 보면서 대학생들은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탐방단은 버스 2대로 인천에서 맥아더동상을 참배하며 누란의 위기에 빠졌던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맥아더장군의 용기와 전략을 되돌아 봤다. 드디어 오후 5시 단동 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1만톤급의 육중한 몸집에 1천여 명이 승선하는 선박이라 전체 크기는 축구장 같다. 배에는 식당과 카페테리어 그리고 마작을 할 수 있는 방까지 갖춰져 있다.

때마침 서해의 아름다운 일몰과 함께 수백 마리의 갈매기 떼가 날아드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갈매기들은 승객들이 던져주거나 들고 있는 과자조각을 날름 채간다. 모두 신기해한다. 승객들의 행색을 보면 가족단위의 관광객, 한보따리 짐을 진 장사꾼, 깃발을 앞세운 일반 관광팀, 그리고 중국인들로 가득 넘친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동북지역 거주의 관광객이다. 비행기 여행보다는 색다른 멋이다. 탐방단 일행은 선실에서 잠을 청한다.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실었지만 내일부터 시작될 유적지 탐방에 대한 기대감으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탐방지에 대한 서적을 뒤적이다가 어느덧 꿈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압록강과 위화도 회군의 현장

아침 10시 단동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승객 틈에 끼어 하선하는 데만도 줄잡아 한 시간은 걸렸다. 모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리는 모습이 옛날 중국의 노동자를 일컫던 꾸리(苦力)를 연상케 한다. 단체비자를 받았기에 순서대로 줄을 선 모양은 초등학생 영락없다. 대부분 처음 와보는 중국인데다 선박을 통한 입국은 많이 낯설다. 그런대로 무사히 입국절차를 마무리하고 난생 처음 밟아보는 중국 땅에 내린다.

대학생들은 흥분을 감추고 관광버스에 오른다. 모든 것이 낯 설은 외국이라고 하지만 건물이나 거리가 한국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생김새도 특별하지 않아 마치 우리나라에 그대로 있는 느낌이다. 40여분 달리니까 단동시내다. 압록강 철교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단동은 북한과의 유일한 무역거래의 제일선이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압록강을 건너 단동을 통과한다.

중국공안이 철통같은 경비를 펴면 틀림없이 북한 고위층의 방문이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단동은 해마다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건너편 북한의 초라한 모습과는 다르게 우뚝 우뚝 솟은 고층빌딩은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경제의 상징이다. 상해의 화려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한미했던 국경도시가 이처럼 성장한 것은 초췌한 북한과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는데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압록강 철교는 6.25때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세워 쌍 다리가 되었지만 끊어진 다리는 중국 측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 단교(斷橋)관광이다. 물론 입장료를 받는다. 다시 세운 다리는 중조우호교(中朝友好橋)다. 다리를 건너면 신의주가 되고 중국이 개발한다는 널따란 황금평이다. 50년 동안 임차하면 황금평은 중국식으로 개조된다. 한국에서 개발한 개성공단식의 지원은 몰라도 아예 임차를 하는 것은 아무리 아쉬워도 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철교를 지나 직진하면 바로 위화도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처럼 비가 많이 내리면 물에 잠기는 섬이다. 산이 없는 평평한 이 섬이 우리 역사에 신기원을 이뤘다. 고려왕의 명령으로 국경침범에 이골이 난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서 이성계는 대군을 이끌고 위화도까지 진군한다. 이제 압록강만 넘으면 오랑캐를 무찌르고 만주일대를 고려 땅으로 복속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이성계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오랑캐와의 전쟁에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병사들을 충동하여 회군(回軍)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역사적인 위화도 회군이다. 아마도 개경을 떠날 때부터 그는 회군을 작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는 왕성했던 기운이 사라지고 기우는 해였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서 고려 조정을 뒤엎고 조선을 건국한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한국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쿠데타다. 그 역사의 현장 위화도가 눈앞에 있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진군했더라면 만주일대는 고려의 땅이 되었을 것이고 고구려의 영광이 재현되지 않았을까 만감이 교차한다. 탐방단은 곧바로 고구려 주몽이 첫 번째 도읍지를 연 환인 졸본성으로 향했다. 졸본성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 산 위에 자리 잡은 도읍지다.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테이블과 같다. 사면(四面)이 모두 천야만야한 절벽으로 되어있는 천애요새다. 지난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결정한 남아공의 수도에도 이런 산이 요하네스버그의 배경이다. 테이블마운틴이다. 졸본성의 크기는 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999계단을 오르면 산이 아니라 대평야가 나온다. 우물도 있으며 집터도 나온다. 고구려 시대의 유적지다.

산 끝자락 낭떠러지에 이르면 ‘요녕제일경’이라는 비석이 서있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비류수는 참으로 감탄을 자아낼만한 절경이다. 푸른 강물이 휘돌아드는 산자락의 절묘함이 어찌 저다지도 아름다운 곡선을 이룰 수 있을까 절로 감탄이 터진다. 주몽은 이 아름다운 산하를 내려다보며 대고구려의 미래를 구상했으리라. 지금 졸본성은 중국에서는 아예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 오녀산성으로 부른다.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40년을 지탱하며 나라의 기반을 닦은 고구려는 2대왕 유리시절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 400년 동안 세력을 넓힌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이 최대의 활약을 했던 곳이다.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식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지 금년으로 꼭 100년째다. 1910년 경술국치를 통분히 여긴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형제 여섯 사람이 같은 뜻을 갖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회영선생 일가는 가족회의를 열고 “우리 집안이 지금까지 양반노릇을 하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사직이 튼튼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나라는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백성은 노예로 전락했다. 우리가 기구한 목숨을 이어가며 왜적 밑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재산을 팔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결의한다.

노블레스 오빌리쥬의 전형이다. 그들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의 거금을 만들어 일가전체가 중국으로 건너가 한미하 근처에 터를 잡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군사력이 약하여 나라를 빼앗겼다는 인식 하에 철저하게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다. 둔병제를 택하여 생도들은 가족과 함께 입주하여 훈련에 임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중국군의 무관양성소인 황포군관학교 등을 모방하거나 참조한 흔적이 있으며 무려 10년에 걸쳐 운영된다. 여기를 거쳐간 훈련생만 3500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독립군에 편입되어 훈련이 부족한 장병들을 단련시키는 큰 역할을 수행한다. 이범석은 약관의 나이에 중국에 망명한 후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된다. 그는 여기서 가르친 제자 독립군을 이끌고 후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 일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대첩을 이룩한다.

현재 신흥무관학교 자리는 100년 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0년 동안 3500여 명이 훈련을 받았으니 교실과 창고, 식당 등 갖추고 있어야 할 건물도 꽤 많았을 터인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무상하다. 피 땀으로 얼룩진 독립운동의 산실이 100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아무도 챙길 수 없는 땅이 되었으니 차마 서글퍼도 울 수조차 없구나.

7월20일 탐방단이 현장을 찾았을 때 가로막는 이들이 있다. 중국 공안(公安)이다. 그들은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제창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그쳤다. 내 나라 동포들이 피 땀으로 일궜던 훈련소 현장에서 선열들이 목매어 기다리던 태극기와 애국가를 들려줄 수 없다니 이 무슨 기막힌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쩌랴. 지금 이 땅은 중국 아닌가. 타협 끝에 광복청년의 노래와 만세삼창은 허용되어 피눈물을 뿌리며 기념식을 거행한다.

만세를 선창한 전대열이사는 비분강개한 어조를 숨기지 않으며 중국 당국의 옹졸성을 규탄했다. 눈물을 머금고 거행된 기념식은 화환증정과 묵념으로 끝마쳤다. 대학생들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분노로 이글거린다. 하늘도 이에 호응하듯 맑고 뜨겁게 대지를 달군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꺾어 누르며 신흥무관학교 유허지에 표지석 하나 설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해야만 했다.

탐방단에서는 이 자리에 마을회관이나 정자를 지어주고 그 옆에 기념표지석을 건립하여 여기가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표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뜻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를 후일로 미룬 일행은 장수왕능을 먼저 참배 관람한 후 광개토대왕비와 묘를 잇달아 찾았다. 한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우글거린다. 이 기념물들은 동북공정에 의하여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어 있다.

고구려는 오직 중국역사의 한 변방국이며 그 뒤 생긴 발해 역시 똑같은 운명이다. 역사상 찬연한 업적을 남기고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훨씬 앞섰던 고구려와 발해를 그대로 한민족의 역사로 놔둬서는 중국의 패권의식과 어긋난다. 따라서 한민족의 연관성은 아예 씨도 없이 없애버리고 모든 것을 대중국에 편입시켜 역사의 왜곡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이 중국의 역사인식이다.

이는 글로벌리즘을 지향하는 중국으로서는 스스로 모순된 행동이며 자가당착으로 귀결날 위험성조차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엄연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화하여 어쩌자는 것인가. 광개토대왕비를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낮춰 부르고 장수왕능을 장군총(將軍塚)이라고 호칭하는 저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국 관광에 나선 한국인들은 사전에 이런 정도의 역사인식은 하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된다.

백두산과 청산리대첩 기념식

송강하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탐방단은 일찍 일어나 백두산을 찾는다. 이도백하를 지나 미인송원(美人松園)을 바라보며 쾌속으로 달려가니 바로 백두산 밑이다. 수없이 많은 관광버스가 즐비하다. 왁자지껄하는 모습이 완전히 시장판이다. 대부분이 한국인과 중국인이지만 서양 관광객들도 간혹 눈에 띈다. 백두산을 달리는 지프는 여전히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앞만보고 올라간다. 천문봉에 올라가니 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천지(天池)의 물 빛깔이 전과 다르다. 과거에 볼 때에는 푸른 물로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남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영롱하기 짝이 없다. 잘 찍는 카메라맨이 정확한 앵글로 한 컷 잡은 듯 너무나 아름다운 천지 모습에 넋을 놓는다. 바람도 없다. 반소매로 다녀도 전연 추운 느낌이 없으니 이게 과연 백두산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탐방단은 백두산을 뒤로 하고 화룡(和龍 )으로 달린다. 첩첩산중 입구에 자리한 청산리대첩기념비는 의연하게 서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중국공안과 맞닥뜨린다. 그들의 요구대로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제창은 생략한 채 격식에 따른 제반 기념식 절차를 마치고 깨끗이 주위를 청소했다. 7월21일이다.

청산리전투는 1921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엿새 동안 청산리 일대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일본군 정규군과 독립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4개월 전 봉오동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독립군 진원지로 알려진 조선인촌을 습격하며 무자비한 살육행위를 저지른다. 이에 대비한 독립군 대장 김좌진과 홍범도는 각자 자기가 거느린 군대를 거느리고 일단 청산리에 숨어든다.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삼림 속에 은신한 독립군을 독안의 쥐로 생각하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다. 정예 일개연대 병력이니 거칠 게 없다. 일본군의 화력은 막강하다. 이에 비해 독립군은 병력과 화력에서 절대 열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김좌진과 홍범도부대는 지세(地勢)를 이용한 작전을 구사하기로 한다.

이 때 이범석은 일본군과 직접 대결할 선두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에 불과한 청년장교다. 16세의 나이에 망명할 정도로 용기가 출중했던 이범석은 황포군관학교에 나이를 감추고 입교하여 졸업한 후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을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자질을 알기에 백전노장 김좌진과 홍범도가 선두를 맡길 수 있었다. 부하 지휘관에 대한 믿음은 사기를 충천하게 한다.

이범석은 비상한 결심 하에 불과 260여 명의 중대병력을 산골짜기 위쪽에 배치한다. 그가 쓴 ‘우둥불’에 의하면 일본군이 우세한 화력과 숫자만을 과신하고 지형지물에 상관없이 걸어서 들어올 수 있는 편한 골짜기로 올 것으로 확신했다. 충무공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을 성공시킬 때에도 수적우세만을 내세워 섬 뒤에 숨겨놓은 조선의 군선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쳐들어오다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범석의 예상대로 일본군 정예 일개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범석부대의 매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첩첩산중으로 스스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포위되었다. 좁은 골짜기이기에 양쪽 산등성이에 매복한 독립군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미동도 않던 독립군의 총부리는 이범석의 사격명령에 불을 뿜는다.

독안의 쥐가 되어버린 일본군은 허공을 향하여 총질을 할뿐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미 표적사격의 대상이 되어 일개연대의 전멸이라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안고 패퇴한다. 청산리전투는 엿새 동안 자리를 옮기며 전개된 대전투다. 정규일본군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들은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들어왔으나 지세의 이점(利點)은 독립군의 편이다. 그들은 시체만을 남기고 서둘러 도망쳤다.

탐방단은 대첩비를 청소하면서 이처럼 큰 전과를 올린 이범석의 이름석자가 비석 건립문에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첩비를 세운 사람들과 이를 주관하는 중국 측의 천려일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김좌진과 홍범도의 명성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다. 그들의 명령으로 이범석이 실제 전투를 지휘한 것이긴 하지만 김좌진과 홍범도에 이어 이범석의 전공도 청산리에서 지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윤동주 시비. 한중대학생 토론회

7월22일 탐방단은 연변대를 방문하여 버스로 학교관광을 마친 다음 윤동주가 살던 용정으로 달렸다. 그가 다닌 대성중학교 자리에는 대표작 서시(序詩) 시비가 서있다. 윤동주와 이상설의 기념관을 둘러보며 용정의 독립운동가들이 싸운 수많은 족적을 살핀다. 문익환목사도 이곳 출신이다. 용정은 해란강과 용문교의 선구자 고향이다. 우리는 선구자 노래를 합창하며 말을 타고 달리던 독립운동의 선구자를 추모한다.

용정에 가면 윤동주생가도 방문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다시 연길로 돌아와 냉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뗀다. 중국 연길은 조선족 자치주다. 중국에는 모구 56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숫자가 많고 문화적으로 특성을 가진 민족은 자치주로 인정받는다. 이런 자치주 중에서는 티베트와 같이 스스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가 중국군의 침범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자치주로 전락한 곳도 있다. 달라이라마로 대표되는 티베트의 항쟁은 중국의 패권에 억눌린 소수민족의 상징이다. 연길의 거리는 온통 한글 간판으로 가득 차있다. 물론 한글을 위에 쓰고 한자를 밑에 쓰는 것이 조선민족 자치주답다.

연길에는 조선족이 세운 연변대학이 있다. 재학생 2만 명이 넘으며 한국에서 온 유학생만도 400여 명이나 된다. 대부분의 강의는 한국어로 진행한다. 교수진은 북한과의 교류 때문에 김일성대학에서 수학한 이들도 있지만 한중 수교이후에는 모두 한국으로 온다.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학문연구의 자유, 연구발표의 기회부여 등 한국을 선호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기 때문이리라.

연변대 김호웅교수는 한국문화센터 전형교수 등을 대동하고 연변대생 50여 명과 함께 한중대학생 토론회가 열리는 용가미원을 찾았다. 용가미원은 조선족 조각가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거대한 정원을 만들고 그 안에 미술관과 강당, 유스호스텔, 식당 등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정원 한 가운데는 제법 큰 섬이다. 여기에 출렁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게 했다.

정원을 삥 둘러 신규식선생 등의 업적을 기리는 돌 조각상을 세웠다. 용가미원에 들어서는 초입에는 중국의 상징 모택동의 조각을 세워 여기가 사회주의 중국 땅임을 일깨운다. 강당은 나무의자 200여개를 설치하고 마이크 시설까지 갖춰 아담한 세미나를 열기에 손색이 없다. 토론회는 양국 대학생 각 3명씩 발표를 하고 질의응답의 순서를 가진 다음 전대열이사의 총평을 들었다. 주제는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고찰이다.

젊은 대학생답게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각자 준비한 주제를 씩씩하게 소화해냈다. 필자는 총평을 통해서 토론 자체보다 양국 대학생 특히 한 민족이면서도 국적이 다른 대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을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비록 태극기와 애국가를 마음대로 게양하지도 못하고 부르지도 못하는 현실이지만 한중 양국의 친선교류는 계속되어 이해를 넓히는 일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토론회를 마친 탐방단은 푸짐하게 차린 만찬장에서 들쭉술로 건배를 한다. 연변대 교수단도, 탐방단 지휘부도 모두 취했다. 그 동안의 강행군 끝에 처음으로 마셔보는 술이다. 이제는 단동까지 되돌아가 귀국선에 몸을 싣는 일만 공식적으로 남았다. 단동까지는 길고 먼 거리다. 통화에서 하룻밤 더 숙박해야만 다음날 박작산성을 보고 단동항구까지 갈 수 있다. 용가미원에서의 하룻밤은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여가다. 연변대측 일행을 떠나보내는 대학생들은 그 사이 정이 들어 포옹을 풀지 않는다.

대학생은 대학생끼리, 교수들은 교수끼리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여정의 고달픔을 달랜다. 넓은 용가미원의 호숫가와 마당은 노래 소리로 훤자한다. 아직 일정이 남았지만 마치 마지막 밤인 듯 가슴을 열고 낭만에 젖는다. 이번 탐방을 통해서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노양규단장, 권두환교수, 이필헌 군사연구소장, 박영희, 이승기, 임정빈 이상철 등 지대장과 진해종간사 등은 한 시도 맘을 놓지 못하고 탐방기간 내내 신경을 써야 했다. 탐방을 통해서 애국심을 배웠다는 대학생들의 뜨거운 가슴도 모두를 감격하게 만들었다. 이 행사는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시행되지만 지원금은 태부족이다. 일부 자비부담으로 충당하지만 국가보훈처 등 관계기관의 좀 더 큰 관심이 필요하다.
▲     필자 / 전대열  대기자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