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 신현지 기자]  6·25 참전 호국영웅이 유전자 분석 신기술에 의해 181번째로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에 안겼다.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갓 결혼한 아내를 남겨두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름모를 야산에 무명인으로 묻혔던 호국 영웅 ‘박동지 이등상사’. 그가  71년만에 가족들에 돌아왔다. 그러나 오매불망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2년 전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남동생만이 그의 귀환을 맞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고 박동지 이등상사님 생전사진 (사진=국방부)
고 박동지 이등상사님 생전사진 (사진=국방부)

성탄절을 이틀 앞둔 23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경기도 파주시 소재 고(故) 박동지 이등상사 유가족 자택에서 박 이등상사에 대한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거행했다. 행사에서는 고인의 신원확인통지서와 호국영웅 귀환패, 유품 등이 담긴 ‘호국의 얼 함(函)’ 등이 유가족에게 전달됐다.

이날 고 박 이등상사 동생 박희만(69)님은 "너무 기쁘다. 내 생의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다만, 형님의 유해를 조금 더 빨리 찾았더라면, 형님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했던 형수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안타까워 목이 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국방부에 따르면 박동지 이등상사는 1928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6·25에 참전했다. 당시 박 이등상사는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소속으로 '수원 북방 전투'1(950년 7월3~4일)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3일,故 박동지 이등상사 유가족 자택에서 거행된 박 이등상사의 '호국영웅 귀환행사' (사진=박희만 님)
23일,故 박동지 이등상사 유가족 자택에서 거행된 박 이등상사의 '호국영웅 귀환행사' (사진=박희만 님)

수원 북방 전투는 당시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한강 방어선에서  철수하여 1950년 7월 4일에 혼성수도사단과 육군 2·7사단이 시흥-안양-군포-수원 일대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의 공격을 방어하고, 육군 1·3사단이 판교-금곡리-풍덕천-수원에서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방어했던 전투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수원 북방에서 적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하여 ‘축차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방어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 했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결국, 7월 4일 하루간의 방어전투 끝에 수원이남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전투 중에 '박동지 이등상사'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인이 전사한 지 60여 년이 지난 2012년 11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서  고인의 좌측 대퇴골 부위의 일부 유해와 전투화 밑창, 버클, M1탄 등 유품이 수습됐다. 이 과정에는 제보자 손창희(77)님의 유해소재 제보를 토대로 경기 성남지역에서 실시한 전사자 발굴을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손 제보자는 과거 어린 시절, 부친과 함께 인근 야산에 올라갔다가 박격포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사자들을 부친이 지역 무덤 형태로 직접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발굴현장에서는 유해가 있던 곳에 실제로 60mm박격포탄과 수류탄이 함께 발굴됐다.

고 박동지 이등상사님 최초식별 현장사진 (사진=국방부)
고 박동지 이등상사님 최초식별 현장사진 (사진=국방부)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엔 유전자 분석기술의 한계 때문에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실패했으나, 올해 재분석을 통해 박 이등상사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고인의 신원 확인은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가 확보돼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박 이등상사의 유가족(형제·조카)은 지난 2006년 이후 3차례에 걸쳐 유전자 시료채취에 응하는 등 고인을 찾기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졌다.

71년 만에 가족품으로 돌아온 고 박 이등상사는 1928년 1월 12일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에 배우자를 만나 혼인했으나 가정을 이룬 기쁨도 잠시, 20세에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자로 가족에게 전해졌다.

당시 갓 결혼한 아내 역시 천주교 신자로 남편의 전사 소식에도 혹여나 남편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벽에 남편의 사진을 걸어놓고 평생을 기도로 살았다. 그러다 안타깝게도 92세를 일기로 2019년에 별세했다. 당시 고인의 남동생 박희만 님은 형수의 유골함에 고 박 이등상사의 사진을 넣어 함께 장례를 모셨다.

23일 본지와의 인터뷰에 박희만 님은 “형수님이 마지막까지도 형님을 기다리셨던 것 같다. 임종 직전에도 자꾸만 문 쪽만을 바라보시며 누가 왔냐고 되물으시고 하셨다. 자식도 없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만 형님을 기다리시며 사셨다. 형수님이 평생 간직했던 형님 사진도 군에서 받은 표창장에 붙은 아주 작은 사진이라 형수님 유골함에 넣어드릴 때는 확대해야만 했다."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  박희만 님은 "형님이 돌아오셨으니 두 분을 합장할 생각이다. 내년 6월에 동작동에 형님을 모시는데 그때 형수님을 모셔올 생각이다. 그날이 71년 만에 두 분이 나란히 함께하시는 날이다 ”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한편, 군 당국이 지난 2000년 이후 현재까지 발굴한 6·25전사자 유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사례는 박 이등상사를 포함해 모두 181위다. 국방부는 유가족들과의 협의를 거쳐 고인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의미 있는 안장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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