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남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이두열 선생,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고석주 선생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윌리엄 린튼 선생, 건국훈장 애족장(2010년)

[중앙뉴스= 신현지 기자]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서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거나 이로 인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역사만큼은 결코 인간이 잊힐 권리라는 망각의 범주 안에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올해로 103주년이 된다.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국권 상실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국가의 주권 회복을 위해 계급·계층·종교·지역·성별을 넘어 분연히 일어선 역사적 대규모의 민족운동이다. 세계를 향해 자주독립을 외치던 민족운동은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려놓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강력한 토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이 있기까지 을미의병운동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치열하게 항쟁해온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 역시도 애국지사의 후손에 대한 예우는 물론 일제 잔재 청산에 얼마만큼의 속도를 내는 것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본지는 신년호 기획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땅에 몸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또 그 정신을 되새기고자 ‘기억합니다’라를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국가보훈처와 광복회가 호남 최초 만세운동인 군산 3·5 만세운동의 주역인 김수남, 이두열, 고석주, 윌리엄 린튼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시계방향으로 김수남, 이두열,윌리엄 린튼,고석주 (사진=국가보훈처)
시계방향으로 김수남, 이두열,윌리엄 린튼,고석주 (사진=국가보훈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물결은 독립선언서와 함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 3월 5일 군산 옥구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라북도 곳곳에서 울려 퍼진 신호탄이었다.

당시 군산은 식민지 도시였다. 1899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미곡수출항으로 군산을 주목했고 이곳에 몰려든 지주와 기업가 출신의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에서 대규모 농장을 건설해 미곡 생산과 수출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에 군산의 조선인들은 일본인 농장의 소작농이 되거나, 낮은 임금을 받고 부두에서 힘겨운 육체노동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군산 사람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의지는 매우 컸다. 1917년에 군산청년야학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이 흐름의 한축을 담당한 것이 미국 남장로교 계열의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였다.

1896년 4월,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lessandro D. Drew, 유대모)라는 두 명의 선교사들이 군산에 교회를 짓고 선교를 시작했다. 1900년 하나의 선교 지역에 교회와 병원, 학교를 모두 갖추어 전도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결정한 남장로교의 제9차 연례회의에 따라 군산에도 구암교회, 군산예수병원 그리고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설립됐다. 학교에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교사로 근무했으며. 이들은 학생들과 우리 민족의 독립을 소망했다. 그리고 이것은 3.5 군산 만세시위의 주도적인 역할이 되었다.

그러니까 군산의 3.5 만세시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을 다니던 김병수로부터 출발했다. 1919년 2월 26일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으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일으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달받았다. 김병수는 그날로 기차에 몸을 싣고 모교인 영명학교로 향하였다. 군산에 도착한 김병수는 곧바로 스승인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를 찾아갔고 그를 통해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들을 소개받았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이두열과 전북 옥구 출신인 고석주도 이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이두열은 영명학교 교사였고, 고석주는 구암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였다. 두 사람은 같은 교사였던 박연세, 김수영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예수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과 교회 신자들, 영명학교의 학생들도 동참하기로 결의했다.

이 같은 계획 아래 이두열과 고석주는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였으나 3월 6일, 시위 계획은 불행히도 거사를 하루 앞두고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영명학교에서 만세 시위가 준비된다는 첩보를 들은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준비하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된 것이었다. 일제 경찰은 이두열과 고석주를 비롯한 교사들과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를 본 학생들은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과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면서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거리에 있던 민중들도 이에 화답하면서 만세 시위는 더욱 커졌다. 민중들은 군산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이리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해 시위 군중을 탄압했다. 거사를 준비하다 체포된 이두열은 1919년 4월 30일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고석주도 같은 재판에서 같은 죄목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이후에도 고석주는 민족운동에 투신했고, 충남 서천에 교회를 개척해 계몽운동과 농촌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학교의 교장이던 윌리엄 린튼은 1912년 22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조선에 와 1917년, 전임 베너블 후임으로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이후 리튼은 일제가 군산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교사와 학생들을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훗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애틀란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서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운동을 증언했다.

또 지역 신문 애틀란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했다. 이후에도 린튼은 계속해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했으며, 한국으로 돌아온 린튼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다. 이에 결국 신흥학교는 폐교되었고, 린튼은 1940년 일제에 의해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린튼은 196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에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3월 5일 만세운동 이후 군산에서는 만세시위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여기에 군산 출신노동자 김수남이 있었다. 김수남은 동료들과 다시 한 번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준비했으며, 이들은 3월 15일부터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해 군산 지역 학생들에게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이 교장인 군산공립보통학교에서는 쉽게 만세시위를 준비할 수 없었다. 결국 김수남은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분노와 억압받는 학생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항일의식의 표출로써, 공립학교를 불태워서 민족독립의 열망을 표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23일 밤 11시 동료 이남률과 만난 김수남은 학교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솜에 알콜을 적셔 학교 건물 1개 동을 전소시켰다. 방화 이후에 일제 경찰에 붙잡힌 김수남은 1919년 5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렇듯 군산의 3.5 만세시위는 한강 이남에서 벌어진 독립선언 만세운동으로 이후 전라북도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종교계와 교육계 그리고 노동계가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전개한 군산의 3.1운동은 전민족적, 전민중적 봉기라는 3.1운동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의미를 가진다.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두열 선생과 고석주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수남 선생은 같은 해 건국훈장 애국장, 윌리엄 린튼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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