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해, 만주방면, 독립장
백남준, 만주방면, 독립장
강제하, 만주방면, 독립장
최명수, 만주방면, 애국장

[중앙뉴스= 신현지 기자]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서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거나 이로 인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역사만큼은 결코 인간이 잊힐 권리라는 망각의 범주 안에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올해로 103주년이 된다.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국권 상실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국가의 주권 회복을 위해 계급·계층·종교·지역·성별을 넘어 분연히 일어선 역사적 대규모의 민족운동이다. 세계를 향해 자주독립을 외치던 민족운동은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려놓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강력한 토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이 있기까지 을미의병운동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치열하게 항쟁해온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 역시도 애국지사의 후손에 대한 예우는 물론 일제 잔재 청산에 얼마만큼의 속도를 내는 것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본지는 신년호 기획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땅에 몸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또 그 정신을 되새기고자 ‘기억합니다’라를 연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최명수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최명수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올 해로 광복을 맞이한 지 77주년이 되는 해다. 대한통의부 창립에 기여하고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강제하·이웅해·백남준·최명수 선생을 기억하기로 한다.

통합 독립운동체인 대한통의부는 두 가지의 임무 달성을 목표로 했다. 첫째는 경신참변으로 폐허가 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하루빨리 재건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근본 목표인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에 통의부는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웅해·백남준·강제하·최명수 등 네 분이 남만주 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통의부를 이끌었다.

통일부를 이끈 네 분의 활동을 보면, 먼저 이웅해 선생은 초기 독립군기지 터전을 다진 독립군 지휘관이었다. 1878년 함경남도에서 출생한 선생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주저하지 않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함께  망명한 동지들과 항일무장의 기반을 조성하다가 1919년 4월 15일 류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이라는 독립군단을 성립시켰다.

그런데 대한독립단은 설립된 지 얼마 후, 구성원 간에  갈등으로 복벽파들은 기원독립단을, 공화파는 민국독립단을 만들며 분리되었다. 이웅해 선생은 기원독립단을 선택해 부단장을 맡았고, 1920년 초, 조맹선이 관전현에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가 성립되어 그 단체의 사령장으로 옮겨가자 기원독립단의 총단장이 되었다.

선생이 이끈 기원독립단뿐 만 아니라 적게는 백여 명 많게는 수백 명의 독립군을 보유한 만주의 독립군단들은 1919, 20년 치열하고도 줄기찬 항일무장 전투를 펼쳤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1922년 봄에는 남만주지역 독립군단 대표들은 통합 독립군 단체인 대한통의부를 성립시켰다. 당시 선생은 통의부를 성립시키기 위한 회의인 남만한족통일회의에 22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했다.

이어 통의부 설립 후에는 총장 김동삼 밑에 편성된 8개의 자치조직 중 민사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다 참의부 세력 이탈 후 남은 인사들이 다시 한국 독립군의 통합을 주장하며 전만통일회의를 개최하자 1924년 6월 하순 통의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북만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군 지도자로서의 행적은 북만주에 들어와 있던 일제 세력에게 포착되고 말았다. 1928년 12월 경 일제 경찰대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당해 징역 8년을 언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남만주 독립군기지 구축에 앞장선 백남준 선생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 (사진=국가보훈처)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 (사진=국가보훈처)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군 지휘관 백남준 선생은 1885년 7월 28일 평북 운산군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남만주로 망명하기 이전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11년에는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판결 받았다. 석방 후 남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망명했고, 1915년 그곳에 민족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校)를 설립했다. 1919년 3월에는 한교공회(韓僑公會)라는 독립군단을 설립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와 함께 그 시기 서간도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韓族會)의 지단장직도 수행했다.

1920년 초, 서간도 관전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이 성립되었다. 백남준 선생은 군사부장 겸 참모부장에 선임되어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광복군총영의 대원들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 시, 국내로 진입해 평남경찰부 청사, 평양부청, 평양경찰서, 선천군청과 경찰서, 신의주역 앞 호텔 등에 폭탄을 투척해 의원들에게 한국독립의 당연성을 알렸다.

경신참변 후, 개최된 남만한족통일회의에 백남준 선생은 동지들과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같은 시기 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움직임이 있고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선생은 통의부로 돌아와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8월부터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남만주를 무대로 조국광복을 위해 이 같은 활동을 수행한 백남준 선생은 1930년대 초, 일제가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뻗어오자 북만주 액목현 중가라는 곳으로 옮겨 정미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1932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성립된 후,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지자 피체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초기 독립군단 통합의 선봉장 강제하 선생

남만주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동한 강제하 선생은 1891년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읍에서 출생했다. 이후 1919년 4월 1일 창성읍 서문밖에서 2천여 명 군중의 선두에서 3·1운동 시위를 주도했다가 일경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고향인 평안북도의 인사들과 힘을 합해 대한독립청년단을 만들고 부단장을 맡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접안지역에서 활동한 대한독립청년단은 수시로 독립군을 국내로 파견해 일제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그 수뇌 및 친일한인들을 처단했다. 또 많은 군자금을 모집해 일부는 청년단의 운영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 활동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1920년 10월경에는 청년단의 단장이 되어 무장활동을 지휘했다.

그러나 일제는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키고자 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에 강제하 선생은 부하 독립군들을 이끌고 산간오지로 일시 피하는 피전책을 썼다. 그리고 만행을 끝낸 일본군이 철수하자 진영으로 돌아 와 파괴된 진지를 재건했다.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의가 개최되자 통의부에 가담해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한인사회와 독립군의 생계를 책임지는 권업부장을 맡았다. 이후 강제하 선생은 통의부에서 교통위원, 행정위원, 법무위원장 대리, 선전위원회 부장, 학무위원장, 재무부장 등의 직을 수행했다.

통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광정단(光正團)·서로군정서 등 7개 단체와 통합해 정의부를 성립시켰고 산하의 교육기관인 화성의숙(華成義塾)의 재무를 맡았다. 이후 정의부에서 대표회 위원,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단체의 최고위 간부로서 역할을 다했다. 1926년 12월에는 동지들과 조선혁명자 후원회를 만들어 조국광복사업에 매진하다가 피해를 입은 당사자나 그 가족을 후원하는 사업을 펼쳤다.

1927년 한국독립운동계는 전 민족운동자들을 하나로 묶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일으켰는데 강제하 선생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만주독립운동계를 하나로 통일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전만주를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남만주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이, 북만주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성립되어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은 당이, 항일무장활동은 군이 추진하게 됐다. 선생은 조선혁명당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최명수 선생

최명수 선생은 1881년 12월 22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출생했으며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곧바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에서 건너 온 신민회인사들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적극 참여했다. 1910년을 전후해 서간도로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1911년 4월 류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세웠다.

그러다 이듬해 통화현(通化縣)으로 옮겨 조직의 체계를 새롭게 하고 단명을 부민단으로 바꿨다. 최명수 선생은 단총(團總)에 선임되어 부민단의 실무를 이끌었다. 이후 부민단은 서간도 전지역의 이주한인사회를 총괄해 이끌며, 건실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위해 서간도 지도자들은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변경했다. 한족회는 실질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해 갈 단체로 이탁(李沰)을 총장으로 하고 단체의 최고결정기관인 중앙위원회와 총무·학무·외무·내무·군무사(軍務司) 등의 부서를 편성했다. 최명수 선생은 내무사 소속인 검무국장과 군무사 소속인 헌병과장을 겸임해 맡았다.

1920년 10월 이후 서북간도의 독립군기지는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 되는 경신참변을 당했다.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통의부에서 선생은 검무국장에 선임되어 활동했으며, 1924년 11월 정의부가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되자 초기 조직을 정비할 시기 자치분과위원에 이어 검리장에 임명됐다.

1927년 이후 한국 독립운동계는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묶기 위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이에 선생은 1920년대 후반 만주를 떠나 상하이로 갔고 상하이에서 활동 중 1934년 12월 6일 일제의 상하이영사관 경찰대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다. 이에 1935년 6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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