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전대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중앙뉴스 칼럼= 전대열 대기자]일제의 강점 하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일본군과 싸웠던 역사는 후손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시일이 지나갈수록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시들해졌다. 

강제합병이 된 후 9년 만에 터진 3.1만세운동은 전국방방곡곡 어디라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손에 손 잡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불렀다. 이완용 등 매국노들은 일제로부터 백작이네 후작이네 하는 허울 좋은 귀족칭호를 받고 엄청나게 많은 은사금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국민의 증오심은 하늘을 찔렀다.

1909년 12월22일 인력거를 타고 가는 이완용을 단신으로 습격한 이재명열사(현재 민주당 대표 이재명과 동명이인)는 어깨와 허리를 준비한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간신히 살아난 이완용은 6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이재명열사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너희들이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서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준엄하게 재판장을 꾸짖었다. 1910년 9월30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이처럼 애국심으로 뭉쳐진 애국 열사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상해임정은 외교독립운동을 중시하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후 여러 차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귀임을 거부하자 임시의정원에서 탄핵한 후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다시 뽑는 절차를 밟았다. 

그 뒤 김구가 주석이 된 후 이봉창 백정기 등 젊은 열사들이 일본 천황궁에 폭탄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을 했으며 윤봉길의사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리자 도시락 폭탄을 무대에 던져 일본요인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큰 공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중국총통 장개석은 상해 임시정부를 대폭 지원하게 된다. 일제는 임시정부를 말살하기 위해서 요인색출에 나섰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안창호선생만 체포되었을 뿐 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역들은 항주 등지로 몸을 피했다가 13차례의 정부이전을 거쳐 중경에 자리 잡게 된다. 안정을 되찾은 중경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조직의 첫 번째 순위로 정하고 학병을 탈출한 장준하 등을 미군 OSS에 가입시켜 한반도 상륙작전에 참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원자탄의 위력에 넋이 빠진 일본군부가 무조건 항복하는 통에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될 수 있는 기회는 무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 광복군은 중국내에서 일본 관동군과 국지적인 전투를 감행했다. 이우영 이회영 등이 엄청난 사재를 털어 창립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지휘관 교육을 받은 청년장교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만들어 초기 독립군을 이끌었던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하들도 속속 가담했다. 

이들 광복군이 일본 패망 직전까지도 태행산 전투 등으로 중국군 및 팔로군과 협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전투는 1944년~1945년에 집중되었으며 이 때 많은 광복군 용사들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전사했다. 일본의 항복 후 임시정부를 수행하여 광복군 요인들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때 많은 광복군 전사자들의 유골이 함께 귀국하여 유가족들이 인수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중국에 망명했다가 전사한 17위는 유가족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혼과 넋을 조계사 등에 안치했다가 북한산 자락에 합동묘소를 조성했다. 한 봉분 아래 17위를 합장한 것이다. 그러나 추석과 설이 돌아와도 가족이 없는 묘소는 물밥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다. 

흥사단 동지들이 간헐적으로 참배하고 순국선열숭모회(전대열 조대용 김선홍)에서 추석과 설 다음날 추도식과 합동차례를 올렸다. 26차례의 행사를 치렀다. 그 때마다 현충원으로 이장할 것을 호소했다. 역대정권에서 외면한 것을 윤석열정부가 받아드렸다. 8월14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현충원 안장 봉송식을 거행했다. 

순국선열숭모회에서는 9월23일 대전현충원에 30여 명의 회원이 참배했다. 귀로에 독립기념관도 찾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17위의 비석이 있었지만 망자의 이름이 없다. ‘수유리한국광복군의묘’. 모든 비석에는 반드시 누구의 묘라고 새겨야 한다. 상석에 합동으로 새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수유리합동묘소에 조성되어 있는 ‘전사상’(戰士像)을 대전현충원으로 옮겨 열사들의 뜻을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