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현, 서울시자치구공단이사장)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현, 서울시자치구공단이사장)

[중앙뉴스= 박근종]미국 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이 미국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 10년 동안 중국 공장의 생산능력 확대를 5% 이내로 제한하는 「반도체지원법(칩스법 │ CHIPS and Science Act)」 지원금 ‘가드레일(Guardrail │ 안전장치)’ 세부 규정이 공개됐다.

중국 내 공장 생산설비의 기술적인 업그레이드가 아예 금지될 수 있다는 애초 우려보다는 다소 완화된 내용으로 중국에 공장을 보유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소한이나마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준 것이지만, 최악만 피했을 뿐 미국발 ‘반도체 족쇄’ 잔존 독소조항들은 여전히 험난한 고산준령(高山峻嶺)이자 꽉 막힌 첩첩산중(疊疊山中)이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 3월 21일(현지 시각) 공개한 반도체 보조금 ‘가드레일’ 세부 규정을 보면, 1억 5,000만 달러(약 2,000억 원) 이상 미국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보조금을 받은 이후 10년간 중국·러시아·이란·북한 등 ‘특별우려국(CPC │ 요주의 국가)’에서 첨단 반도체의 경우 생산능력을 5% 이상, 범용 반도체는 10% 이상 확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다만, 보조금 반환 요건에 해당하는 반도체 생산능력의 ‘실질적인 확장’을 양적인 생산능력 확대에 한정해 기술적인 업그레이드는 허용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전면 철수까지 우려했던 우리로선 최악만은 면했다.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서 최소한의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며 생산을 늘릴 수 있게 된 것으로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사실 지난해 8월 발효된 미국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은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10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실질적으로 확장’하면 보조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세부 규정에서 규제를 일부 완화해 기술 등을 끌어올려 생산능력을 늘리는 데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예컨대 기술 개발을 통해 웨이퍼(Wafer │ 반도체 제조용 실리콘 원판) 하나당 더 많은 반도체 칩을 만들어 넣는 것은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는 의미다.

미국 상무부가 규제를 완화한 것은 ‘가드레일’ 규정이 과도하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비등하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언론조차 ‘좌파 정책’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지나치게 도를 넘어 「반도체 지원법」이 아니라 오히려 「반도체 패권법」으로 돌변 동맹국 간 신뢰를 흔든 데다, 한국 기업의 중국 공장이 폐쇄되는 경우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고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는 지적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공장을 철수해야 하는 최악의 사태는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리스크(Risk) 자체가 사라진 건 결코 아니다. 미국 상무부의 ‘가드레일’에는 여전히 족쇄가 되는 불리한 독소조항이 그대로 걸림돌로 남아 있다. 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과도한 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에 한국 첨단 반도체 기술과 영업 기밀이 유출될 수 있고,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초과 이익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하며, 군사용 반도체 미국 우선 공급과 생산시설 공개 같은 까다로운 보조금 지급 조건은 여전히 잔존(殘存)한다.

한국 기업들이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와 관련해서도 오는 10월까지 1년간 한시적 포괄 허가를 받은 상태지만 기준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견제망이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고, ‘중국 옥죄기’ 드라이브는 계속 강화될 것으로 보여 한국 기업들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 만들겠다는 ‘조 바이든(Joe Biden)’ 정부의 자국 이기주의는 극에 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외교와 안보 분야는 동맹을 강조하지만, 경제 분야에선 미국 최우선주의와 자국 보호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동맹에 피해를 강요한다는 인식이 뿌리 깊이 확산해 왔다.

소재부터 장비까지 아우르는 반도체 생태계를 미국으로 완전히 흡수하겠다는 마각(馬脚)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The Inflation Reduction Act)」 제정으로 한국산 전기차가 크게 차별을 당한 데 이어, 대중국 반도체 규제를 통해 미국 반도체 산업 부활을 우선시하면서 결국 한국은 첨단 반도체 기술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참으로 심대(甚大)하다.

미국이 527억 달러(약 69조 8,000억 원)의 보조금을 미끼로 중국 견제를 넘어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고서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반도체 설계와 기술을 미국에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생존 차원에서 미국 주도 공급망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반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에 등을 돌릴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진퇴유곡(進退維谷)에 빠진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미궁상황(迷宮狀況)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우리 수출에서 최대 비중인 19%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이 미·중 경쟁 구도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한다. 이번 규제 완화에 만족해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는 결단코 안 된다.

미국의 반도체 정책이 동맹국 기업에 피해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국을 상대로 더 당당하게 요구하고 더 많이 개선해야 한다. 더구나 올해는 한·미 동맹 70주년이다. 특히 외교부는 지난 2월 15일 “역사적인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내실화하겠다.”라며,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포함해 전방위적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겠다.”라고 밝혔다.

특히 “우리 경제를 살리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행동하는 동맹’을 구현하겠다.”라며 미국과의 “전략·안보·경제·기술 등 분야별 고위급 전략적 소통·공조도 더욱 강화해 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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