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신념 없거나 부족한 좌·우가 반드시 읽어봐야 할 명서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력이 역사 발전의 힘인지, 아니면 환경이 가능하게 하고 또 강요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또 서양 문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자신의 민족에 대해 종족적 열등감이나 반발적 국수주의적 태도를 가진 사람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이 책이 나온지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모든 세대의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로서 고전의 의미에 부합하는 명서로 평가된다. 특히 급변하는 현대의 인류 발전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걱정하는 많은 정치적 국민들과 정치인들에게 필요하다.

이 책은 해박한 인문 사회 지리 생물학적 지식을 이용해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문명 격차의 원인과 영향을 분석한다.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집필 목적 외에도 행간에서 읽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시적 통찰의 양과 질을 깊게 주시해야 한다.

 

의문의 시작

다음은 책의 한 부분이다. ‘얄리는 그날 나에게 했던 것처럼 이미 많은 백인들에게 질문을 퍼부었고 나 역식 수많은 뉴기니인들에게 질문한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뉴기니인들이 적어도 유럽인들에게지지 않을 만큼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 순간 얄리는 아마도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금 그 번뜩이는 눈빛으로 나를 찌를 듯이 바라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물품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 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물품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얄 리가 경험한 삶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 평균적인 유럽인이나 미국인의 생활 양식 사이에는 아직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와 같은 생활 양식의 격차는 세계의 다른 여러 민족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물론 이런 격차가 벌어진 직접적 원인에 대한 설명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하다. 어떤 민족들은 총기, 병원균, 쇠를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다른 민족을 정복하여 남보다 먼저 정치·경제적 힘을 얻었다. 반면에 어떤 민족들은 끝까지 그와 같은 힘의 요소들을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얄리와 저자 사이의 대화는 책의 집필 동기로서 ‘문명 격차’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뉴기니 원주민 얄리는 눈빛은 왜 번득였을까? 질투였을까? 인간의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이다. 하지만 질투를 넘어 ‘문명 격차’의 발생 원인에 대한 순수한 의문으로 쉽게 전화하는 쪽은 질투로부터 자유로운 서양인 제러드 다이아몬드였다.

‘문명 격차’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문명 간의 우열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다음은 문명 간에 형태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서양의 물질 문명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므로 문명의 격차를 언급하는 사람은 항상 후자의 의미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관점이 과연 다른 것인가. 형태의 차이는 생산과 소비의 물질 종류와 질, 양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과 북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는 마냥 단순하게 형태의 차이라고만 단정하지는 않는다. 또 문명 격차의 문제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문제다. 동아시아 원주민인 우리에게는 동서양 문명 격차로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얄리 같은 뉴기니 원주민들에겐 흑인종과 백인종간의 격차로 인식된다.

문명 격차는 멀리 떨어져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는 게 병이라고 이렇게 서로 다른 양식의 문명이 지리적 격리를 뛰어넘어 만나게 될 때 문명 격차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져온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흑인 노예제도, 종교갈등, 질병의 세계적 만연 등 이른바 세계화의 문제다. 세계의 생활 양식이 질적, 양적으로 통합돼 간다지만 유럽의 생활 양식을 받아들인 지역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도 과연 그 격차가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인간 평등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지금도 이 정치적 경제적 힘의 차이는 국가 간이든 한 국가의 내부 간이든 계속되고 있다. 이 힘의 차이가 인간 능력의 차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고 모든 사람이 말하지만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느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단순히 지리적 환경적 조건이 동일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 사이에 물질적 힘(총·균·쇠)의 차이를 발생시켰다고 해명한다.

문명 발전이 인간의 창의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문명 격차는 원주민들의 태생적 능력의 차이를 반영하겠지만 문명 발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 평등의 이데올로기는 보호될 수도 있다. 소위 ‘금수저’라는 신조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복잡하고 큰 사회의 힘. 총·균·쇠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뉴기니인들이 대체로 유라시아인들보다 똑똑하다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뉴기니가 유라시아에 비해 면적도 훨씬 작고 대형 가축 동물의 수도 훨씬 적다는 사실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창의성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는 하다. 다만 어떤 환경은 다른 환경에 비해 더 많은 재료를 구비하고 있으며 발명품을 이용할 수 있는 제반 여건도 한결 유리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환경의 차이는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을 보다 용이하게 하며 이렇게 해서 식량을 축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같은 기후대를 아우르며 넓게 펼쳐진 유라시아 대륙이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의 재료와 기술 발생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곳곳에 인간의 이동과 만남을 방해하는 높은 산지와 사막이 있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는 반드시 전파의 경로가 있었고 유럽에서 재배하는 작물은 같은 기후대의 아시아에서도 재배할 수 있었다.

반면 기후대와 고도가 다른 지역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은 사이 사이에 칸막이를 쳐놓은 것처럼 작물과 가축의 전파를 어렵게 했다. 저자는 유라시아 대륙 문명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문명간의 격차에는 이렇듯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을 통한 식량 생산을 불러온 환경적 조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농업적 식량 생산이 복잡한 정치 사회와 문자 발병을 초래했고 기술은 문자를 타고 빠르게 전파됐다. 복잡한 사회 사이의 대규모 전쟁도 생존에 중대한 도적이 됐다. 식량 부족과 과밀 인구라는 도전이 인간으로 하여금 필사적인 창의력을 발휘해 농업을 발명케 했고 전쟁의 도전은 금속기술과 무기의 발전을 가져왔다. 물론 생존본능만이 인간의 행동을 불러 일으킨다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연인도 있고 대의명분 앞에 목숨을 내거는 독립투사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집단적 삶을 발전시킨 요인은 생존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컸던 것이다.

인간의 수렵과 채집 시대를 지나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을 통해 식량을 축적했다. 잉여 식량이 전쟁을 부르고 정치가와 예술가를 부양하면서 사회가 복잡해져 강력한 권력을 형성했다.

어떠한 권력가가 자신의 성공을 전적으로 스스로의 창의성과 능력에 의한 결과물이라 여겼다면 자신의 권력을 절대적인 영역으로 착각한 것이다. 권력은 환경적 또는 문화적 상대성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국가를 통해 인간은 평등하며 삶의 양식은 다양해야 정상이고 오히려 문화 다양성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눈앞에서 문명간 또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계간의 힘을 차이를 매일 접하는 사람들에게 문화 상대주의의 슬로건은 하나의 위안거리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서양 문명에 비해 동양 문명이 열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서양 문명은 서양인만의 성과라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동남아시아나 오지 원주민의 생활방식을 게으르고 무지해 소위 야만적이라고 깔보는 사람들, 특히 자신들의 권력에 지대한 영향을 준 환경이 두렵기에 오히려 그 환경을 지배하고 누르려는 문명(?)은 이 책을 통해 제 그릇을 갖추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