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회적 갈등은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발생한다

니버는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의 보수주의가 지배세력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육과 지성과 용기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천진난만한 사고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니버는 자유주의와 맑스주의를 모두 비판했다. 맑스주의를 포함해 모든 극단적 개혁운동은 인간본성에 대한 감상적으로 결박한 낙관주의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은 낙관주의에 입각한 사회개량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정통주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강조하며 그 어떤 사회적 개선에도 비관적 입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비관주의 입장에서는 타락했지만 낙관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 행동으로 형성되는 역사를 이성으로 정복할 수는 없다

니버는 도덕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집단이 비도덕적이라고 본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본다.

하나, 인간집단의 행동에는 양심과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는데 집단이기주의적 충동이 강할 경우 아무리 양심과 이성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

둘, 이성의 기능을 지나치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이지 않는 세력들이 역사를 추동하고 있다. 집단행동으로 형성되는 역사를 이성으로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환상이다.

셋,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에 보조를 맞추면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도덕과 사회 그리고 지성 분야의 교육 계발에 노력을 발휘해도 ‘지배세력의 약탈적인 이기심’에 부딪혀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 새롭고 완전한 모범을 보인다고 해서 갈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주의적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갈등을 서로 다른 ‘행동유형들’간의 충돌 결과로 해석하면서 ‘새롭고 완전한 행동유형’을 제공하면 갈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천진난만할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단순히 무지 외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이기심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듯한 ‘새로운 행동유형’을 제시해도 사회적 갈등은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은 도덕적이나 집단은 비도덕적이다

니버가 개인은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더 존중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사회교육을 통해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적이지 않은가. 원래 이기적인 사람도 많지 않은가. 그런데 니버는 “그 사람들이 애초부터 그렇게 이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비도덕적인 사회집단에 속하다 보니 그렇게 이기적으로 된 것 뿐이다”라고 말한다.

니버는 집단의 도덕이 개인의 도덕보다 더 열등한 이유를 든다. 첫째는 자연적 충동들에 비금갈 만한 합리적인 사회세력을 형성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직 개인들의 이기적인 충동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적 충동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은 개별적으로 나타날 때보다는 하나의 공통된 충동으로 결합돼 나타날 때 더욱 생생하게 더욱 누적되어 표출된다는 것이다. 집단은 합리적 사회세력이 되기 힘들고 집단은 이기적인 충동으로만 구성되는 집단적 충동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강한 집단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러한 집단이 국가와 국민의 지배세력이 된다면? 전체주의는 그렇게 기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직에 충성하는 인간은 개인의 도덕보다는 집단 이기주의에 편승한 개인의 비도덕인 이해관계를 합리화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하는 것이 된다.

 

사회적 갈등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고 강제력은 불가피하다

사회의 권력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 갈등은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남녀 갈등, 노사 갈등, 사회적 강자와 약자 간의 갈등 등등. 그런데 이러한 갈등들은 조정과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 방식으로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어떠한 해결도 불균형이 잔재하기 때문이다.

집단이기주의는 항상 완강하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강제적인 요인이 불가피하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여기서 결국 사회적 갈등 자체를 제거할 수 없다고 하는 니버의 비관적 입장을 확인하게 된다.

니버의 문제해결 대안으로는 이러한 말로 요약된다. “강제가 없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된 이상적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 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으로 되는 그런 사회의 건설”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본성의 불가피한 한계와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의 한계를 고려할 때 과연 이러한 건전한 저항은 가능할까. 그가 말년에 피력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대략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군이 부재하고 이데올로기가 허무한 시대에서 바라는 것은, 우파든 좌파든 제 3세력이든 간에 상대의 폭주를 막고 균형부터 이루고자 하는 경쟁이 막상막하의 시소 게임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의 견고함이다. 그 견고함을 파괴하려는 개인이나 집단은 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국민의 국가에 의해 결국 강하게 견제받으며 역사는 좌충우돌 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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