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왜 생기는가

프로이트는 문명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의 공격본능이 이웃사랑을 쉽지 않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렝 핑켈크로트(Alain Finkielkraut, 1949~)는 그 이유가 공격본능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더 단호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런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그 원인은 인간의 내재적 공격본능보다는 이웃에 대한 ‘미움’과 ‘증오’에 있다고 말한다.

타인이라는 존재가 내 주권에 제기하는 위협을 증오의 발생 원인으로 꼽는다. 사람들에게 타인은 나의 주권을 빼앗고 절대적인 수동성을 강요하는 위압적 ‘권력’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타인이 무슨 대단한 정치권력을 쥐고 있거나 강한 육체적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하더라도 타자와의 ‘관계’ 혹은 ‘결합’ 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에게 자기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면서 나의 본성에 폭력을 가해온다는 것이다.

“내가 공격적 충동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언제나 나에게서 달아나는 타자로부터 달아날 수 없기 때문이며 나는 이웃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그의 선택받은 자이며 그의 인질이자 그에게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미움은 타자가 내리는 명령에 대해 몰락한 주권자인 나의 반항이며 이의제기”라고 핑켈크로트는 말한다.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 자체에서 비롯되는 이런 근원적 수동성이 타자를 증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특히 개인적 관계에서 사회 또는 정치적 또는 국제적 관계로 확장할 때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게 한다.

 

 

이웃사랑? 그런 것은 없다

앞서 말했지만 핑켈크로트는 단호하다.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라는 것을 이타주의나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연민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듣기에만 번지르르할 뿐 닳아빠진 이 ‘사랑’이란 말에서 여전히 내 이웃이 나에게 가해오는 무겁고 압도적이며 떨쳐버리기 힘든 다가옴, 거의 비난에 가까운 부담과 일종의 폭력이나 박해를 받을 수 있다면 그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웃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타자는 나를 순진하고 충만하게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타인은 존재의 방해자이기 때문에 타인의 부름에 강요된 나는 나약해지고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도덕적 의무를 부여받고 이웃을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웃이 나를 가로막고 쫓아다니며 사랑을 요구하며 나의 본성에 폭력을 가해온다는 것이다.

악은 몰락한 주권자인 내가, 주권자의 자리에서 나를 밀어낸 타자에게 행하는 반항이며 항의이다. 모든 지적 능력을 다 동원한 끝에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야”라는 단호한 결론에 도달하는 거짓 신념으로부터 극단적인 폭력에 이르기까지 악은 나를 간섭하고 내 존재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타자를 벌주려는 원초적인 의지로부터 생겨난다고 핑켈크로트는 말한다.

 

나를 악하게 만드니까

이웃에게 있어서 가장 가증스러운 점은 나의 경쟁자라는 역할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라고 한다. 적대감이나 위협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의 헐벗음이 나에게 내리는 명령이라면서 선택받은 사람이란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은 사람, 심지어 자신은 아무런 죄는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타인의 얼굴은 나를 바로 이런 존재로 만들기에 나의 폭력은 이 부당한 선택에 대한 응수인 것이 된다. 내가 타인에게 악한게 아니라 나를 그가 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살인을 범하거나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은 다만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열망일 뿐이라고 말한다.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개념은 ‘성역’이나 ‘성스러운 에고이즘’의 개념처럼 모든 이데올로기는 초월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절대적 주권의 꿈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주권이 어떤 의무에도 방해받지 않고 제멋대로 누빌 수 있는 지점까지 데려가 준다.

그래서 그것이야말고 존재가 그 존재 자체로서 개화하고 그 고유의 형태로 분출하며 인간성과의 충돌없이 스스로를 전개할 수 있는 세계, 바로 형이상학적 유토피아의 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자를 끝까지 쫓아 공격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역사 또는 지금의 세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

타인에 대한 증오 안에는 보편성의 고수나 혹은 전통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이 가져온 배타적 행위 이상의 것이 내재한다. 거기에는 핑켈크로트가 말하듯이 주권자의 자리에서 추락한 자아의 복수심과 전지전능한 힘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핑켈크로트의 분석을 빌어 끝맺자면 타인은 하나의 상처다. 반유대주의는 존재에게서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해버리고 세상의 무거운 짐을 없애버리겠다는 야망인 것이다.

타인은 나에게 명령이고 채권자다. 주권을 빼앗는다. 경쟁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는 아예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핑켈크로트의 말들을 대략 요약보건대 이쯤되면 믿을 건 이제 신뿐라고 말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라는 존재에게 남은 오로지 나에게 상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야 존재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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