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현 컬럼니스트
조정현 컬럼니스트

장자는 ‘소요유’(逍遙遊)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성공적인 듯한 삶들에도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작은 벼슬살이를 할 만한 지식을 갖춘 자→한 고을에서 이름이 날 정도의 실천력을 갖춘 자→한 나라의 임금에 맞먹을 정도의 덕망이 있는 자→한 나라의 범위를 넘어선 송영지→열자→지인(至人)‧신인(神人)‧성인(聖人)” 이들 중의 마지막 단계를 장자는 참 자유인이라 칭한다.

이런 단계들은 현대사회인들에게도 삶의 형태들에서 ‘가치의 위계’에 대한 어떻게 다르게 성립되는가에 대한 생각거리를 하게 만든다. 이 단계들에서 중간쯤에나 있을 법한 ‘한 나라의 임금에 맞먹을 정도의 덕망이 있는 자’의 단계는 고사하고서라도 아니 그 전 단계인 ‘한 고을에서 이름이 날 정도의 실천력을 갖춘자’까지도 못하더라도 첫 단계인 ‘벼슬살이를 할 만한 지식을 갖춘자’조차 되지 못한다면 감히 어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길 바랄 수 있을까.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그 두 번째 이야기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아서 그 가치를 쓰지 않는 게 더 나은 가치이기에 은둔해버린 허유의 이야기다. 진정한 가치의 위계는 그가 지닌 덕의 그릇이 얼마나한가를 보여준다.

옛날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면서 이렇게 말했어. “해와 달이 높이 떠올랐는데 횃불을 아직도 끄지 않는다면 빛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때맞추어 단비가 내렸는데도 계속 도랑물을 끌어대려 한다면 또한 쓸데없는 고생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임금자리에 앉으면 천하가 다스려질 텐데 내가 아직도 주인 노릇하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천하를 당신께 바칠까 합니다”

그러자 허유가 이렇게 대답했어.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서 천하가 이미 다스려졌는데 내가 당신을 대신한다면 나더러 이름만 차지하란 말입니까? 이름이란 마치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와 같은 것인데 나는 껍데기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뱁새가 깊은 수풀 속에 집을 짓지만 나뭇가지 하나며 충분하고 생쥐가 황하 강물을 마시지만 배를 채우면 그만입니다. 임금께서는 돌아가시지요. 나는 천하같이 넓은 물건을 쓸 데가 없습니다. 게다가 요리사가 요리를 잘 못하다 하더라도 축문 읽는 사람이 제사상을 뛰어넘어 대사하는 일은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허유처럼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그에 맞게 세상을 살아내는 이는 정말 드문 일일까. 그런데 그도 그이지만 할 만큼 했다고 임금자리를 물려주려는 요임금야말로 자신의 도리의 때를 알았던 것이리라.

말그대로 허유에게 뒤를 봐달라고 임금자리를 내어주려했던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일상이든 정치든 간에 사는 것에는 그렇게 ‘가치의 위계’가 있는 법이리라. 문제는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일 것이다. 자기 자신과 패거리의 일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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