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성군이 나타나 태평천하로 다스려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누구나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에는 항상 변함이 없는데도 “내가 다스려보겠다”고 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 “그렇게 되겠어?”라는 의심을 품는다. 심지어 반감도 갖는다.

다 갖춘 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역사는 없다. 그나마 세상을 다스리게 됐을 때 다 갖춘 자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세인들에게 굳게 믿게끔 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리고 세인들도 그렇게라도 하여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바란다.

조정현 컬럼니스트
조정현 컬럼니스트

속세를 해탈하고자 하는 장자는 말한다. 그렇게 다 갖춘 자라면 세상을 해탈했다면 뭣하러 구질구질하게 백성들을 다스리겠냐고 말이다. 세상을 해탈하였기에 백성들을 잘 다스릴 것 같지만 막상 해탈하고 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리라. 충분히 그럴 만하다. 왜냐하면 세상을 다스린다고 세상이 다 그렇게 되지 않기에. 그래서 신선들은 속세로부터 은둔하여 자유를 만끼하는 자다.

그렇다고 속세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핸드폰이 터지는 마당에 속세에 익숙해진 지금에는 그렇게 쉽게 ‘탈속’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스려주기’를 바랐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푸념이 깊어질 때만큼은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워 그야말로 소위 ‘정치’라는 게 꼴 보기기도 싫다. 그래서 이럴 땐 속세에서 도피하지 않은 상태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최고일 것이다. 마치 ‘생활의 달인’처럼 말이다. 그들은 속세의 시련과 갈등을 도피하지 않고 극복해 버린 것이다.

신선이라함은 마치 그 ‘생활의 달인’같은 것이리라. ‘달인’이 됐는데 뭐하러 구질구질하게 세상을 다스리려 하겠는가. ‘아득한 들판’에서 자유롭게 노닐며 살면 그만인 것을.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세 번째 이야기는 사람들은 너무도 잘난 누군가가 세상을 다스려주기를 바라지만 ‘구질구질하게’ 뭐하러 그러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나 스스로가 속세에서 도피하지 않고 자유를 얻는 삶을 추구할 뿐이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 또한 그런 능력을 갖추라고 질책하는 것이다. ‘다스려주기’가 지나치면 맹목적인 믿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견오가 말했어. 막고야 산에 신선이 사는데 그들은 피부가 마치 얼음이나 눈처럼 희고 처녀의 살결처럼 부드러운데 곡식은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을 마시며 그름을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사해 밖에서 노니는데 그들이 정신이 응집되면 백성들이 힘들게 농사짓지 않아도 햇곡식이 저절로 익는다고 하기에 나는 미친 소리라고 여겨서 믿지 않는다네. 연숙이 말했어 그렇겠지 본래 장님은 아름다운 옷장식을 감상하는 데 끼어들 수가 없고 귀머거리는 아름다운 악기소리를 감상하는 데 함께 할 수 없는 법이지. 어찌 몸에만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있겠는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자네 같은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런 사람과 그런 덕은 만물을 반죽해서 하나로 만들 것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스려주기를 바라지만 누가 구질구질하게 천하를 일거리로 삼으려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그 무엇도 해칠 수 없는지라 홍수가 나서 하늘까지 물에 잠길 지경이라도 빠지지 않으며 가뭄이 들어 쇠나 돌까지 녹아 내리고 흙산까지 그을릴 정도가 되어도 뜨거워하지 않을 터. 이 사람들의 찌꺼기를 가지고도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빚어낼 수 있을걸. 그러니 그들 중 누가 천하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송나라 사람이 은나라의 화려한 장보관을 밑천으로 장만해서 월나라에 갔는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 문신을 새기는지라 쓸 곳이 없었다고 해. 요임금이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해내의 정치를 고르게 한 다음에 네 신선을 막고야 산에서 찾아 뵙고 분수의 북쪽에서 멍하니 천하를 잊어버렸다고 하더군”

세 번째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요임금이야말로 진정 신선이 된 듯하다. 백성을 고르게 다스린 후에야 속세를 잊었으니 말이다.

임금은 아무쪼록 다 다스린 후에야 속세를 잊겠다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임금을 잘못 알아본 경우라 한다면 다스리는 면모를 본 다음에야 뒤늦게 잘못돼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현재를 고루 다스리려 치중하지 못하고 다스린 후에도 임금처럼 속세를 만끽하고 누리며 보장받겠다는 수작이 보일 때 그러하다. 왜 그러하겠는가. 스스로 죄가 많으면 ‘나’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속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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