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권력의 다툼은 역사가 시작된 옛날부터 있어 왔기에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하다. 자유는 정치 권력자의 압제에서 보호받는 것을 의미했다. 권력자들이 일반 인민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불가피한 것처럼 인식됐다.

다수 사회구성원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과 같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갖는가?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하므로 당신의 의견은 포기되거나 희생돼야 할까? 사수의 생각이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의 생각을 억압하거나 침해할 때 개인의 자유는 어떻게 보장돼야 할까?

이 질문들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성찰했던 주제다. 밀은 권력의 횡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회에 나타나는 또다른 문제, 이른바 ‘다수결의 횡포’를 문제 삼고 있다.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이런 폭력이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그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조정현 컬럼니스트
조정현 컬럼니스트

밀은 이런 사회적, 집단적 폭력에 맞서 개인의 개별성과 독립성을 지키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권력을 제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본다. 그는 집단의 생각이나 의사가 개인의 독립성에 함부로 간여하거나 간섭하지 못하도록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 정치적 독재를 방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독재 못지않게 다수집단의 사회적 독재가 개인의 사상적, 감정적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은 대중의 목소리가 커지는 우리 시대에 오히려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다.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태에 우리가 어떻게 개입하여 개인의 자유를 지켜야 할 것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라는 단어가 유독 거창해 보인다. 그래서 말을 바꿔 본다. 적어도 나 사는 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현대사회는 선거를 통해 수립되는 민주 공화정으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정부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람들의 면밀한 관찰과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은 그 권력이 행사되는 대상과 늘 같은 것은 아니다. ‘자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스스로를 지배하기보다 각자가 자기 이외 나머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정치 체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의 의지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 또는 인민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일부 사람들, 다시 말해 다수파 또는 자신을 다수파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의지를 뜻한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자신들 가운데 일부를 억누르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도 있기에 다른 권력 남용 못지않게 이에 대한 주의도 게을해서는 안 된다.

정기적으로 새로운 집권자가 선출돼 가장 강력한 집단에 책임을 지는 경우가 되더라도 정부가 개인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어떤 정치 체제라도 ‘다수의 횡포’는 온 사회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그 다수는 비단 많은 수의 표심으로 반영될 수도 있고 정부 권력이 될 수도 있고, 합법적 권력 조직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예나지금이나 실질적 힘의 추를 지닌 세력이다.

민중의 여론이 그 힘을 한 데 모으고 행동하는 데에는 개개인의 삶을 실제 흔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물리적 공간에 엄청난 수의 인원이 직접 동원되어야 하고 그 개개인들의 일상과 생계를 희생해야만 가능하다. 즉, 너무 많은 국민이 직접 거리로 뛰쳐 나와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적지 않게 경험해 왔다.

여론만으로는 변하지 않는 상태일 때, 국민은 불가피하게 직접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명분있는 이념이 작동할 때의 일이다. 정치를 노골적으로 세습하려 하고 그 정치를 위해 국민에게 희생을 정당화해 특권의 삶을 누리려 할 때 저항의 명분이 작동해 왔다. 과거에는 명백하게 불법을 저지른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합법적 권력의 무능에 대한 기준이 필요한 때다. 그 언젠가 누군가가 “무능은 죄가 아니다”라고 했었던가. 무능을 지켜보는 것은 국민의 삶을 담보로 하는 낭비요, 사치다.구차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은 투명한 과정을 통한 유능한 성과를 전제로 한다. 그 시간을 동행하는 것이 정치인 것이다.

국민이 정치를 더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도록 새로운 이념이 필요한 때다. 새로운 명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는 무능이다. 과거를 곱씹는 정치가 지속되면 국민은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2024년은 총선이 있는 해이다. 그래서 새로운 명분의 이념을 들고 나오는 그 누군가를 언제쯤 만날 수 있는지 더욱 궁금하다. 그래서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상상과 이상으로만 그칠 수 있는 용처럼 공허하지나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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