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난 제주의 바다에 봄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봄은 원래 바다로 먼저 오는지라 담청색이던 제주의 겨울 바다를 조금씩 연둣빛으로 바꿔놓는 중이다. 섣부르게 대지에 도달한 봄기운은 땅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장다리꽃을 피워 올렸고 하나둘씩 유채꽃망울을 터뜨려대고 있었다. 이른 봄을 만나려 달려간 제주, 그중에서도 동쪽 해안에서 보낸 기분 좋은 하루.

 

흰 무명천을 담그면 쪽물이 들 것 같은 파란 바다가 있고 눈부신 모래사장 펼쳐진 멋진 해변이 있으며,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길이 펼쳐진 곳.

제주의 동쪽 해안 여행은 물빛 고운 함덕 해변에서 시작한다. 서쪽의 협재해변과 더불어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정식 명칭은 함덕서우봉해변.

유난히 모래가 희어 하늘이 맑은 날엔 눈이 시릴 정도다. 9백미터에 이르는 백사장과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얕은 바다가 있어 여름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대단히 북적이는 해변이다.

늘씬하게 선 야자수나무들과 빨간 등대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주고 학꽁치 잡이에 여념 없는 강태공들로 여유로운 봄날의 풍경이 그려진다.

함덕을 지나면 곧바로 김녕해변이 나타난다. 바로 이곳부터 본격적인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시작할 수 있다. 군데군데 나 있던 몇개의 해안도로가 이어져 동쪽 해안 대부분을 잇는 긴 해안도로가 탄생했다.

김녕해변에서 시작되는 이 해안도로는 행원리와 종달리, 성산일출봉과 신양 섭지코지, 온평리를 차례로 지나 삼달리까지 32킬로미터나 이어져 있다.

김녕을 지나 만나게 되는 월정리 바다는 이미 봄기운이 넘실댄다. 유난히 파란 바다와 그 바다색과 똑같은 색의 하늘이 있어 수평선 끝의 경계가 뒤섞여버리는 광경이 펼쳐진다.

여느 관광지와 달리 한적하기 그지없는 월정리 해변에서 딱 한 군데 붐비는 곳을 꼽으라면 해안도로가에 들어앉은 작은 카페, ‘아일랜드조르바’이다.

육지 출신의 세 여자들이 월정리 바다에 반해 카페를 차렸고 어느 날은 바닷가에서 춤을 추고 또 어느 날엔 쪽지 한 장 덜렁 써놓고 유람을 떠나고,

또 어느 날엔 지인들을 모아놓고 달빛 아래에서 파티를 열어대는 곳이다. 게다가 이 여자들이 어찌나 뻔뻔한지 월정리 바다가 제 바다인 양 의자 몇 개 해변에 늘어놓고는 “저기 앉아 바다를 보세요”라고 말한단다.


우뭇개해안에서 ‘물질’을 하고 올라온 해녀. 뒤쪽으로 성산일출봉이 펼쳐져 있다(왼쪽 사진). ‘아일랜드조르바’ 앞 해변과 광치기해변에서 바라 본 성산일출봉의 일출.
우뭇개해안에서 ‘물질’을 하고 올라온 해녀. 뒤쪽으로 성산일출봉이 펼쳐져 있다(왼쪽 사진). ‘아일랜드조르바’ 앞 해변과 광치기해변에서 바라 본 성산일출봉의 일출.

성산일출봉·섭지코지 품은 32킬로미터 해안도로

진하고 달달한 커피 한 잔 받아들면 그녀들이 귓가에 속삭이는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여행자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이상한 바다가 틀림없이 그곳에 있다. 지금은 이곳 아일랜드 조르바와 인근 평대리 마을 안에 같은 이름의 카페 등 두 곳으로 나뉘어 운영 중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행원리의 풍력발전기 단지를 스치면 제주 바다의 어머니인 제주 해녀를 주제로 한 박물관과 만난다. 제주 최초의 전문직 여성인 해녀는 제주인의 삶의 근간을 지탱해온 중요한 사람들이다. 해녀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으로 제주 경제의 주축을 이루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제주 항일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구좌읍 하도리의 제주해녀박물관에는 이런 제주 해녀의 역사와 삶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제주 어촌의 모습과 세시풍속을 살필 수 있는 모형들과 태왁, 망사리, 빛창 등 해녀들의 작업 도구도 살펴볼 수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동영상을 통해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을 관람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아이들이 해녀 옷을 입고 바닷속 해산물을 채취해보는 어린이 해녀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성산 일대에 때 이른 유채꽃 하늘하늘

우도가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종달리 해안의 끝자락에서는 해뜨는 마을 성산과 만나게 된다. 참으로 뻔한 관광지이지만 동쪽해안을 찾을 때마다 기꺼이 다시 찾게 되는 곳이 바로 성산일출봉이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사계절의 모습이 다 다르고 어느 날엔 지독한 안개와 더 지독한 바람이 불기도 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화창하고 상쾌한 날의 모습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2007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성산일출봉은 지금으로부터 10만년 전 바닷속에서 수중 폭발해 솟아오른 화산체다. 원래는 섬이었으나 신양변의 땅과 섬 사이에 모래와 자갈이 쌓여 육지와 연결됐다. 해발 1백82미터의 정상에는 지름 6백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분화구가 자리했다.

성산일출봉과 만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느 날의 신새벽에는 일출봉에 올라 제주에서의 첫 해와 대면하고 어떤 오후에는 일출봉 뒤편 우뭇개해안을 찾아 해녀들이 보여주는 소박하고 정겨운 공연을 보며 박수를 치고, 또 어느 만연한 봄날이면 일출봉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 지독하게 노란 유채꽃 위로 봉긋 솟은 일출봉을 눈에 담아본다.

성산 일대의 유채꽃은 제주에서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터라 2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이미 노릇한 유채꽃이 초록의 잎줄기 위를 어른거리기 시작하고 3월 초순이면 성산 지역 대부분의 유채꽃이 만개한다.

성산일출봉과 어우러진 유채꽃 풍경의 정석은 섭지코지이다. 섭지코지에 한 거대 리조트가 들어선 이후 이곳의 아름다움이 망가질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어쨌든 섭지코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여행자를 맞이하고 있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수식어답게 바람이 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허리를 휘어 춤을 추는 유채꽃들 사이로 흰 등대와 교회 건물은 여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섭지의 바다를 끌어들여 설계한 ‘글라스하우스’와 명상센터인 ‘지니어스로사이’는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지니어스로사이에는 거대한 벽에 바람의 통로를 내고는 바다 건너 성산일출봉의 풍경을 액자처럼 볼 수 있게 한 멋진 작품이 있다.

섭지코지 등대에서 내려오는 길, 바람이 차지 않다(왼쪽 사진). 제주 해녀의 역사와 삶을 엿볼 수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오른쪽 위)과 고 김영갑 작가의 김영갑갤러리.
섭지코지 등대에서 내려오는 길, 바람이 차지 않다(왼쪽 사진). 제주 해녀의 역사와 삶을 엿볼 수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오른쪽 위)과 고 김영갑 작가의 김영갑갤러리.

섭지코지를 빠져나와 신양해변과 나란히 달리면 길은 제주 건국신화의 공간인 혼인지가 있는 온평리를 지나 삼달리에 다다른다. 해안도로에서 잠시 벗어나 중산간으로 방향을 틀면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인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도착한다.

이미 제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겐 널리 알려진 곳으로, 고 김영갑 선생이 지난 2005년 루게릭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필름에 담아낸 황홀한 제주의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숲, 나무와 꽃, 구름이 담긴 그의 사진들이 뿜어내는 은은한 감동은 여행자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맴돈다.

두모악엔 제주를 담은 김영갑갤러리도

낮은 돌담 아래 수선화 핀 갤러리의 정원 산책도 멋지다. 갤러리로 쓰이는 건물은 그가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제자인 박훈일씨와 함께 폐교였던 삼달분교의 정원을 가꾸고 건물을 다듬고 제주의 바람을 초대해 만들었다.

자전거여행으로도 좋은 김녕해안도로(왼쪽 사진)와 성산일출봉에서 내려다본 성산읍내.
자전거여행으로도 좋은 김녕해안도로(왼쪽 사진)와 성산일출봉에서 내려다본 성산읍내.

이젠 스승이 떠난 갤러리를 지키고 있는 박훈일 관장은 얼마 전 갤러리 맞은편 밀감저장고에 ‘곳간, 쉼’이라는 독특한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감귤 수확철인 겨울에는 원래 목적인 저장고로 사용하다가 그 외의 기간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요즘은 작품 대신 저장고에 가득 쌓인 귤의 향기가 상큼하다.

고 김영갑 선생의 사진을 만난 후 다시 조우하게 된 제주의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아름답다. 나른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에는 해녀들이 뱉어내는 긴 숨비소리 가득하고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들꽃들은 바람의 노래에 춤을 춘다. 여행의 노곤함마저 감미로운 이 곳, 지금 우리는 제주의 동쪽 해안을 달리고 있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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