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택담보대출의 LTV(담보인정비율)는 40% 중반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터졌을 때 미국의 75% 보다는 낮은 수준이라 금융건전성 차원에서 아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시적인 정책보다는 미시적인 정책으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G20(주요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중인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20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기자들과 만나 “가계 부채는 총량(Stock)만 보는 게 아니라 증가 흐름(Flow)도 같이 보는 쪽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 “금융기관 건전성 문제없어···가계부채는 총량보다 속도·흐름 조절 중심으로 대응해야”

김 총재는 “지금은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명목 GDP(국내총생산) 증가율 보다 높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가계부채 몇년만에 최대’라는 식으로 총량만 보는 측면이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양준혁 선수가 2200타석에 오른 이후 부터는 계속 (새)기록을 내도록 돼있었던 게 아니냐는 예도 들었다.

그는 “소득이 없는 사람이 빚을 많이 지게된다면 가계부채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소득이 많은 사람들(4, 5분위)이 전체 가계부채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금융자산이 금융부채보다 100조원이 많은 상황이기 때문에 당장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통화정책의 수장인 김 총재의 발언은 금융감독당국과 온도 차이가 난다. 금융감독당국은 1000조원 돌파를 앞두고 있는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 증가 속도 뿐만 아니라 총량도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금융감독당국이 정치권과 정부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택거래 활성화를 위한 총부채상환비율(DTI)·LTV 완화에 대해 완강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는 배경이다.

이와 관련, 김 총재는 “DTI를 풀면 가계부채 규모가 더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DTI 등을 완화해서 주택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주장은 실증 분석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김 총재의 발언들을 감안하면 DTI와 LTV 규제에 대해 금융감독당국 보다 강경한 입장은 아닌 것으로 풀이된다.

‘경기흐름 측면에서 주택경기 활성화가 필요한 상황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최근 주택경기는 과거와 달리 수도권과 지방이 다르고 지방 대도시와 소도시 사이에 극심한 차별적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부산, 대전 같은 지방 대도시는 주택값이 많이 올랐지만 다른 지역은 그와 다른 상황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한다”고 즉답을 피했다.

◆ “중장기 인플레에 초점두고 대응할 것···금리정상화 포기 시각은 ‘미스리딩’”

김 총재는 “한은이 물가안정을 외면할수는 없지만 성장률을 높이는 차원에서 물가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며 평소 소신을 다시 강조했다.

그는 “외골수 처럼 물가안정만 외치거나 물가상승률 지표 하나만 보는 단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은이 물가대응 주도권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런 시각에 일일이 대응하기 않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연구기관에 있다면 아카데믹하게 대응하겠지만 중앙은행에 있으니 가만히 듣고만 있다”고 했다.

김 총재는 “중앙은행은 중장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낮추는 게 주요 역할”이라면서 “단기적인 물가상승률 변동폭이 커지는 데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 “영국도 단기적으로 물가상승률이 4~5%로 높아지지만 중기적으로 2%로 가도록 정책을 하고 있고 미국도 중장기 인플레이션 타겟팅이 2%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최근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낮아지고 있으나 글로벌 유동성 등이 많이 풀려 있어 물가압력이 낮아진다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한은이 금리를 통한 물가압력 조정을 포기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은의 통화정책을 ‘미스리딩(오독·Misreading)’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올해 성장전망치 낮췄지만 경기상황 나쁘게 보지 않는다‥유럽 위기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

김 총재는 지난 16일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7%에서 3.5%로 낮춘 것과 관련, “IMF가 지난 석달동안 경제전망을 4번이나 수정할 정도로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한번도 바꾸지 않은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며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경기상황을 나쁘게 보지는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스페인의 국채발행 금리상승 등으로 우려되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 재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위험(tail risk)’으로 치닫을 확률은 높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과거 같으면 여러 돌출변수가 생겼을 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 불확실성이 컸지만 비슷한 위험을 몇차례 겪으며 학습효과가 생겼기 때문에 몰라서 당하는 위험은 상대적으로 완화된 상황”이라며 “각종 국제회의를 통해 습득한 여러 정보들도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국가에 기여하는 중앙은행 만들 것···개혁에 대한 불평은 기득권 목소리”

4년 임기의 반환점을 도는 김 총재는 “국가에 기여하는 중앙은행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총재로 역사에 남길 바란다”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 것 만큼은 한은이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중앙은행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드는 데 남은 2년을 쓰겠다는 게 김 총재의 구상이다.

김 총재는 최근의 조직개편과 인사개혁으로 불거진 잡음에 대한 소회도 밝혔다. 그는 “중앙은행은 국가의 중앙은행이지 중앙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조직은 아니다”며 “(최근 개혁은)중앙은행을 국가의 것으로 환원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30년 넘게 일했다고 중앙은행을 자기(들만의) 조직이라고 생각하고,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틀어막고 독점하는 분위기가 되는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이어 “여기(한은)는 결코 자영업자 조직이 아니다”며 “그래서 중간단계에서 들어오는 통로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은이 국가에 보다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외부 수혈’ 등의 개혁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한국은행 안팎에서 나오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은 이런 변화 과정에서 겪는 불가피한 ‘성장통’으로 보는 듯했다.

김 총재는 “직원들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변화가 낯설수 밖에 없을 것이고,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본능이 강한 것”이라며 “당연히 불평이 나올 수 밖에 없지만 (이는)대부분 과거 이득을 봤던 기득권이 (피해를 봤다고)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총재는 신임 금통위원들이 대부분 물가안정보다 성장에 치우친 ‘비둘기파’에 가깝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그는 “사람들을 미리 ‘매파’ ‘비둘기파’ 이런식의 프레임으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신임 금통위원은 모두 강단이 있는 분들로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면서 평가를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통위원 추천 기관의 추천권 행사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마땅한 대안이 있느냐라는 점도 따져봐야 할 것 같다“며 ”대안이 없는 데 문제삼는 것도 적절해 보이지는 않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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