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은 물 건너… 부패 관행과 철저한 먹이사슬 구조

국내에서 발생하는 부패 사건의 절반 이상이 건설 비리다. 정부나 민간으로부터 건설공사 사업권을 따내려는 대형 건설사와, 다시 이들에게서 하청을 받으려는 중소업체 사이 종속관계가 이뤄지면서 여러 가지 비리가 발생한다.
   
▲ 윤리경영의 삼성물산이 5억9천만원을 협력업체 사장에게 '입막음'용으로 주어 파장이 일고 있다. 한 건설 관계자는 “6억원 정도의 금액이라면 그 돈을 내줄 때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좌측은 삼성물산 정연주 대표이사 부회장 (좌측 인물은 ⓒ삼성물산 홈페이지 캡쳐)

최근에도 국내 대형 건설사의 비리가 드러났다. 지난 12일 삼성물산 건설부문 관계자들이 재개발조합 간부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다. 삼성물산 관계자 2명은 사업 시공사로 선정되고자 재개발조합 간부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10억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했다.

삼성물산은 금품 제공 뿐 아니라 하청업체로부터 향응·접대를 받은 일도 있다. 이에 하청업체 사장이 삼성물산의 ‘약점’을 미끼로 삼성물산을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약점’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채 삼성물산을 협박한 하청업체 사장만 구속됐다. 검찰이 ‘공사판 먹이사슬’에서 강자의 힘으로 작용되는 사례였다.

협력업체는 먹이사슬의 최약자
한 언론매체에 따르면 삼성물산의 협력업체를 운영했던 조모씨는 지난 2008년 2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물산 본사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폭로할거다”고 소리를 높였다. 조씨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삼성물산으로부터 조적과 미장공사를 하청 받아왔다. 그러나 회사가 문을 닫자 조씨는 2008년부터 삼성물산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조씨는 “삼성물산 현장 직원들을 접대하느라 손실이 났다”며 삼성물산 측에 돈을 요구했다. 만약 돈을 주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시위를 하며 언론 등에 비리 사실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물산 측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조씨에게 5억9천만 원의 돈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씨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씨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삼성물산 측에 생활비와 사업자금 명목으로 6천만원을 더 달라며 1인 시위를 벌였고, 결국 삼성물산은 지난해 말 조씨를 공갈 혐의로 고소했다. 현재 조씨는 3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있다.

문제는 당시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의 수사 범위가 삼성물산의 고소장 바깥으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백방준 부장검사)는 2011년 12월 조씨를 공갈혐의로 구속기소,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월 조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은 사건을 무마시키려 또 다른 협력업체를 내세우기도 했다. 얄팍한 이이제이(以夷制夷)로 먹이 사슬 구조를 이용한 것. 삼성물산은 조씨에게 돈을 건네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협력업체 대표를 동원했다. 삼성물산 측은 “회사가 직접 돈을 건네면 이것이 약점이 될 수 있어 하청업체에 부탁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삼성물산 측이 악성 민원을 해결하려고 힘없는 다른 하청업체를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동반성장·상생을 외친다고 해도 갑을 관계인 원·하청업체 간의 문화를 개선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조씨와 또 다른 협력업체 대표 등, 하청업체는 ‘공사판 먹이사슬’의 최약자일 뿐이었다.

검찰과 삼성은 언제나 ‘또 하나의 가족’
조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비리’가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박기성 전 삼성물산 전무가 회사 직원들의 비위 사실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삼성물산의 ‘래미안’ 브랜드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 등을 염려했다”고 밝혔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하도급계약 담당 엄 모 과장이 조씨에게서 500만원을 상납받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삼성물산의 ‘비리’는 여기까지, 조씨로 협박당한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판결문에 적시된 삼성물산의 잘못은 엄 모 과장이 500만원을 받은 것뿐. 하지만 업계에서는 한 직원의 비리 때문에 삼성물산이 5억9천만원을 내놨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한 건설 관계자는 “6억원 정도의 금액이라면 그 돈을 내줄 때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조씨에게 건넨 자금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도 의심된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삼성물산을 비롯한 다른 대형 건설사들이 나도 모르는 계약서를 만들어놓고 그 돈을 준 것으로 위장한 경우를 경험한 바 있다”고 말했다. 조씨에게 돈을 건네는 것을 주도한 박기성 전 삼성물산 전무는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에서도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갖고 있어 소환조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검찰의 추가 조사가 있지 않는 상황에서 조씨와 삼성물산 간에 합의가 이뤄진다면 삼성물산의 비리에 관한 실체적 진실은 묻히게 된다. 현재 조씨는 ‘변호인을 통해 삼성물산에 받은 돈을 돌려주고 합의를 추진 중이니 감형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3월 중순 재판부에 반성문도 제출했다.

삼성의 ‘상생’은 승자의 기록, 약자는 영원한 죽음…
물론 삼성물산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비자금 조성 의혹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다만 “조씨로부터 향응·접대를 받은 (삼성물산)직원들의 명단을 건네받아 퇴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감사를 실시, 접대받은 사실이 드러난 일부 직원에 대해 퇴직 등 조처를 취했다”며 “그 사실을 인정해 돈을 건넨 것”이라고 5억9천만원을 지급한 이유를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몇 명의 직원이 얼마나 향응을 받았고 어떤 수준의 징계를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또 삼성물산 관계자는 조씨를 고소한 배경에 대해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면서 더 이상 협박에 시달릴 수 없다고 판단해 고소를 하게 된 것”이라며 “삼성물산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과거 관행을 끊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차원에서 소송 등의 조처를 취한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은 국내 건설사 가운데 상생에 신경 쓰는 기업으로 꼽힌다. 건설업계에서는 드물게 2008년과 2010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도 펴냈다. 윤리경영도 강조한다. 경영 원칙으로 법과 윤리 준수, 깨끗한 조직문화 유지 등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번 억압받는 하청업체의 분노를 삼성물산이 강조하는 ‘윤리경영’ ‘상생’으로 가리고 사건의 진위, 과정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삼성물산의 비리 혐의는 또 다른 거대재벌 삼성의 흠집이 될 것이다.

경실련 김건호 국책사업감시팀장은 “정부는 대기업으로부터, 대기업은 중소기업으로부터 접대를 받는 등의 먹이사슬 구조에서는 늘 피해자는 제일 아래의 중소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불공정 거래를 끊으려면 우선 그런 사실이 드러날 경우 지금처럼 단순 벌금형에 그치지 않고 훨씬 강력한 제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제공=강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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