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훈장 동백장 노량진 ‘젓갈 할머니’ 류양선씨

류양선씨는 근검 절약해 모은 돈 23억여원을 교육계에 기부해 온 ‘기부 천사’다. 그는 2001년 한 전자회사 CF에서 ‘디지털’을 ‘돼지털’로 발음해 ‘돼지털 할머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가난 때문에 공부하지 못한 한을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풀어 온 류씨의 삶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소개돼 있기도 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도 어려운 학생들 도울 생각만 하면 힘이 난다고 한다.


류양선 할머니는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37년째 젓갈을 팔고 있다. 그는 자린고비로 모은 돈 23억여원을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과 사회복지시설 운영자금으로 기부했다.
류양선 할머니는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37년째 젓갈을 팔고 있다. 그는 자린고비로 모은 돈 23억여원을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과 사회복지시설 운영자금으로 기부했다.
평일 오전 11시, 노량진 수산시장은 한산했다. 새우젓, 명란젓, 황석어젓 등 갖가지 젓갈을 파는 충남상회에도 손님의 발길은 뜸했다. 가게 주인 류양선(79)씨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16제곱미터(5평) 남짓한 가게는 온갖 젓갈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자그마한 나무의자가 유씨의 업무 공간이자 쉼터였다.

졸고 있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손님이 없으니까 지루하다”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러곤 쏟아지는 졸음을 쫓을 요량인지 머그컵 가득 대추차를 따라 숟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잡은 류씨의 손이 사시나무 떨 듯 심하게 떨렸다. 수전증을 않은 지 벌써 20년이 됐다고 한다.

“이젠 온몸이 성한 곳이 없네.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프고, 누우면 팔다리가 쑤셔서 당최 (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재산이라곤 이 몸뚱이밖에 없는데….”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젓갈가게 지켜

팔순을 바라보는 류씨가 이렇듯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시장에 나오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 처지가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것. 평생 남보다 덜 먹고 덜 쓰며 아낀 돈을 아낌없이 기부해 온 류양선씨가 국민훈장 동백장(3등급)을 받았다.

“정부가 제일로 큰 상을 나한테 준다고 하니 좀 부담스럽네. 상이라는 것은 앞으로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는 의미로 주는 것이니께.”

목소리에 기운이 없고 호흡이 가빴다. 커피를 대접하겠다며 일어서려다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리가 몹시 불편한 듯했다. 그는 “몇해 전 무릎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는데 빗길에 넘어지는 바람에 재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나뭇등걸처럼 마른 무릎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사실 그는 3년 전 무릎수술뿐만 아니라 위암수술까지 받았다. 여느 노인들 같으면 벌써 자리보전하고 있어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가게를 지키고 있다. “건강을 위해 이제는 좀 쉬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집에 있으면 몸이 더 아파. 심심하기도 하고. 여기 이렇게 나와서 사람들도 보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살맛이 나지. 평생 그렇게 살아서 여기가 집보다 더 편해. 삼시 세끼 모두 여기서 먹으며 살았잖어.”

커다란 젓갈통 옆으로 김치와 마른반찬이 담긴 플라스틱 통과 전기밥솥이 보였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이 가재도구들이 검박하기 이를 데 없는 류씨의 삶을 설명하고 있었다.

류씨가 이곳 노량진 수산시장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75년이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그는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스물여덟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아기를 낳지 못해 시어머니와 남편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남편이 아이를 낳아 줄 여자와 딴살림을 차리면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학 설립이 꿈이었던 류씨는 고향 서산의 한서대에 19억여원의 발전기금을 기부했다. 한서대는 ‘류양선 장학재단’을 설립, 매년 우수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대학 설립이 꿈이었던 류씨는 고향 서산의 한서대에 19억여원의 발전기금을 기부했다. 한서대는 ‘류양선 장학재단’을 설립, 매년 우수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아직 도울 학생들 많은데 장사 안돼 걱정

남편과 헤어진 후 업둥이 딸을 들쳐 업고 시작한 일이 젓갈 장사였다. 그는 “업둥이지만 딸만큼은 공부에 한이 없도록 하겠다”며 열심히 젓갈을 팔았다. 그러다 1983년 겨울 우연히 한 교회에 불우이웃돕기 성금 대신 새우젓 한 드럼(당시 시가 30만원)을 기부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을 떴다. 이후 류씨는 돈이 모일 때마다 전국 초·중·고교와 대학교, 양로원, 재활원, 보육원 등 사회복지시설에 후원금을 냈다. 그렇게 내놓은 기부금이 23억9천여만원에 이른다.

공부에 한이 많은 류씨는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을 주로 도왔다. 고향 서산에 있는 한서대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장학재단이 설립돼 있어서 매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 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아직도 많은데 젓갈 장사가 옛날 같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한때 하루 6백만~7백만원이던 매출이 지금은 20만~30만원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지 않는 게 매출감소의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요새는 옛날의 10분지 1도 못 팔아. 하루 매상이 20만~30만원이면 적자야. 그런데도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 얼마전에는 가락동 사는 젊은 여자가 전해 줄 것이 있다고 가게로 왔는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잘 차려입은 멋쟁이야. 그 멋쟁이가 읽어 보라며 두툼한 편지봉투를 주길래 안 받았어. 무슨 내용일지 뻔히 알거든.”

반대로 차림새가 남루한데도 가게에 올 때마다 1만원씩 주고 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만원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께 고맙게 받아서 귀하게 쓰고 있다”고 말했다.

류씨는 젓갈을 팔기 시작한 이후 지금껏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적이 없다. “힘들게 번 돈을 왜 쉽게 쓰느냐”며 시장상인회에서 주최하는 야유회나 여행에도 함께한 적이 없다. 몸이 불편한 그를 돕기 위해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나온 5촌조카 김병일씨는 “이모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몸이 아파도 마음이 즐거우니 장사 계속”

“노량진 수산시장에는 젓갈 가게가 총 10개 있습니다. 대부분의 가게는 부부나 식구가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아침과 저녁 교대로 일을 하죠. 그런데 이모님은 교대할 사람이 없어서 줄곧 혼자 일하세요. 그러니 몸이 성할 수가 없죠. 이제 그만 쉬었으면 좋겠는데 남을 돕겠다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거운 젓갈통을 이리저리 옮기는 조카를 보며 류씨가 한마디 했다.

“몸이 아파도 마음이 즐거우니까 하는 거야.”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류씨가 자신의 명함을 한장 건넸다. 거기에는 “죽는 날까지 책을 가까이하라”라는 류씨의 잠언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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