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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교조가 합법화되어 10년 만에 선린인터넷 고등학교에 복직한 그는 2008년 진보정치 운동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민주노동당 비대위 활동을 수락하여, 33년의 교사 생활을 접기도 했다.
두 차례의 옥살이와 수년간의 수배생활이 보여주듯이 그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념을 꺾지 않은 채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고 그것은 고난과 시련의 길이었다.
이번 시집도 예외는 아니다. 공교롭게도 시인은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중에 경찰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다. 화재사고로 한 순간에 가족을 잃은 용산4가 철거민들과 함께하던 중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는 고난과 시련의 결과물로서의 시가 아니라, 이제는 차라리 “고발이나 폭로”이어야 할 시를 생각한다. 어쩌면 시야말로 “내일 닥칠 일을 오늘 알려주는 일이거나 저항의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가끔은 위로나 눈물이라고도 생각했고 그래서 꽃이고 햇살이고, 작은 풀잎, 부는 바람”이기도 했던 시인의 시는 때로는 “깊은 계곡 물소리”였다가 “계곡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야말로 “사람이고 사랑이었습니다”라고 되뇌인다. 용산화재참사로 목숨을 잃은 철거민들과 그의 유족, 그리고 쌍용차 파업사태로 고통 받은 사람들에게 시인은 시를 바친다.
김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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