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급증에도 처벌은 `솜방망이'…"특별대책 필요"

금융권에서 횡령, 비리, 서류 조작 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황금만능주의 풍조가 팽배해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탕 하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감시망은 허술하기 때문이다.

은행ㆍ보험ㆍ카드업계에서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조작, 공금 횡령, 고객 계좌 무단 열람, 개인정보 유출, 전산사고 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대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비리를 어렵게 적발하더라도 금융 당국의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쳐 금융권에 만연한 모럴 헤저드 척결은 백년하청이라는 지적도 있다.

◇금융 비리 피해액 4년 만에 3배 급증

금융권 비리의 심각성은 통계만 들여다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비리 피해액은 2006년 874억. 2010년 2천736억으로 4년 만에 무려 세배가 넘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범죄 양상이 갈수록 대담해지면서 사고액이 많이 늘어난 탓이다. 은행권 비리는 2010년 57건으로 2009년 48건보다 19% 증가했다.

그러나 피해액은 391억원에서 1천692억원으로 무려 333%나 급증했다.

금융회사별 5년간 사고액은 은행권이 3천579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비은행 1천920억원, 증권사 896억원, 보험사 264억원 등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비리에 연루돼 면직당한 금융권 임직원은 469명이다. 연평균 94명이 금융권에서 퇴출당했다.

급기야 금융권 탐욕을 규탄하는 시위가 미국 월가에서 시작돼 지난해 한국으로도 확산하면서 은행권이 자정을 결의,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은행들은 손쉽게 번 돈을 외국인 주주에게 흥청망청 배당하고 임직원 급여를 올리는 데 썼다. 4대 금융지주의 작년 평균 급여(계약직 제외)는 8천만원 수준으로 삼성전자보다 많다.

탐욕도 모자라 비리도 서슴지 않는다.

올해 들어 8월10일까지 은행, 증권, 보험, 신용카드, 저축은행 등 5대 금융권역에서 금감원 검사로 제재를 받은 임직원 수는 447명이다. 임원 95명, 직원 352명이다. 작년 동기(222명)의 배를 넘었다.

기관에는 경고 7건, 주의 13건이 내려졌고 과태료만 27억9천만원이 매겨졌다. 지난해 1년간 부과된 과태료 25억1천만원을 넘어섰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금융사들이 직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다 보니 직원들이 영업 실적에 급급해진다"면서 "소명의식이 실종된 탓에 고객 돈을 빼돌리고 서명을 위조하는 일들이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탐욕도 모자라 거액 횡령사건 속출

은행권에는 단순 비리 차원을 넘어 고객의 돈을 몰래 챙기는 횡령과 대충 사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은행 지점장은 지난 2월 고객 계좌에서 38억5천만원을 빼내 5~6개 계좌에 나눠 이체하고 잠적했다.

우리은행 간부는 고객 6명의 예금 31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들통나 최근 구속됐다.

하나은행 직원은 2009년 회사 공금 1천800억원을 횡령한 동아건설 자금부장의 범행을 도운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경남은행 직원은 2010년 신탁자금을 빼내 투기성 사업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자 저축은행에서 사기 대출을 받아 철창신세가 됐다.

이 직원은 16개 금융기관에서 은행장 이름으로 대출을 받으면서 경남은행에 3천262억원의 보증책임을 지게 한 혐의가 드러났다.

우리은행의 한 부동산금융팀장은 2010년 1조4천억원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해주는 대가로 부동산 시행사에서 수백억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5월 상품권 횡령, PF 대출 부당 취급, 이사회 결의 위반 등 비리가 적발된 하나은행에 기관 경고와 과태료 3천750만원을 처분하고 임직원 28명을 징계했다.

저축은행 사태는 모럴해저드의 결정판이었다.

9조원대 금융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된 부산저축은행그룹 박연호 회장은 항소심에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은 시중은행 수시 입출금 계좌에 넣어둔 회사 자금 200억원을 마음대로 찾고서 중국으로 밀항하려 한 혐의로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을 구속했다.

영업정지된 도민저축은행의 채규철 전 회장의 자택과 관련 창고에서는 페라리 등 슈퍼카와 수십 대와 4천여 점에 달하는 명품 오디오가 쏟아졌다.

은행의 무분별한 보너스 잔치에도 시선이 곱지 않다.

외환은행[004940]은 올해 기본급 400~500% 수준의 위로금을 직원들에게 줬다. 신한은행도 200~250%의 성과급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 CD금리 조작의혹, 학력차별, 정보유출도 줄줄이

CD 금리 밀약 의혹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조사에 나서면서 확산했다. 3개월 만기 CD 금리는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이나 기업대출의 기준금리로 사용돼 파문이 컸다.

금융소비자원은 CD 밀약 조사와 상관없이 집단 소송에 돌입했다. 급기야 금융 당국은 새 대출 금리지표인 `단기 코픽스' 도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2조513억원의 순익을 거둬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신한은행의 사례를 보면 은행권의 부도덕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순익은 고객한테서 받는 수수료를 올리고 고객에게 주는 이자나 혜택은 낮추는 방법으로 극대화했다.

신한은행은 개인신용대출 금리를 매길 때는 대출자의 학력 수준에 차등을 뒀다. 고졸자 이하 대출자에게 13점을 주면서 석ㆍ박사 학위자에는 54점을 줬다.

고졸자의 신용 평점은 석ㆍ박사의 4분의 1에 불과해 대출 비용이 확 올라간다.

고졸자들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은행 대출에서도 심각한 불이익을 받는 셈이다.

국민은행은 지난 7월 말부터 8월 10일까지 850여곳의 재개발ㆍ재건축 아파트 사업장 중도금 집단대출 가운데 900여건의 서류를 조작했다가 금감원에 적발됐다.

부유층 서비스도 과다한 것도 문제다. 한 푼이 아쉬운 서민에게서 얻은 수익 일부를 부유층 마케팅에 사용하기 꼴이기 때문이다.

일부 카드사는 연회비 100만원으로 최대 600만원까지 혜택을 볼 수 있는 초우량고객(VVIP) 카드를 무분별하게 운영하고 있다.

금융사 직원의 정보 유출도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삼성카드[029780]는 지난해 80여만건의 고객 정보를 내부 직원이 유출했다. 하나SK카드 직원은 수만 건의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

카드사 직원이 빼돌린 고객 정보는 스팸 메일이나 보이스피싱 등에 악용돼 고객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잇따른 전산사고도 금융권의 기강 해이 실태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농협에서는 지난해 4월 전산망이 전면 마비되는 사태를 겪었음에도 올해 1월 또다시 전산 장애가 생겼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의 비리와 탐욕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개선 조짐이 없는 데는 허술한 감시망과 함께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한다.

대형 사고를 쳤음에도 상응하는 처벌이 없어 금융사들의 도덕 불감증이 자연스레 악화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고객 정보를 유출한 현대캐피탈, 삼성카드, 하나SK카드 모두 경징계를 받는데 그쳤다.

따라서 솜방망이 처벌은 금융사 긴장도를 떨어뜨려 또 다른 대형 사고의 원인이 되는 만큼 금융 당국 차원의 특별 대책이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금융권 안팎에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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