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ㆍ中企 사지로 내모는 금융시스템 근본 개선도"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돈 되는 장사'에 주력한 탓에 신뢰가 추락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윤리의식이나 철학이 부족한 것도 금융권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금융권이 탐욕 이미지를 벗고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일회성' 지원책을 내놓는데 그치지 말고 소명의식을 갖고 뼈를 깎는 자정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금융 당국 역시 금융권의 모럴해저드를 제때 감시하고 막지 못한 책임이 있는 만큼 더는 정치적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 근본적인 금융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제언했다.

금융권 수익성 급급한 탓에 본래 기능 상실

전문가들은 최근 금융권에서 발생한 양도성예금(CD)금리 조작 의혹, 대출서류 조작, 대출금리 차별 등의 논란에는 수익을 올리는 데만 연연한 금융기관들의 영업행태가 근본적인 원인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3일 "금융권 신뢰가 추락한 근본 원인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 서민과 중소기업을 살리는 금융 본연의 기능보다는 안정적인 담보를 잡고 이자를 버는 영업행태를 벌여온 관행이다"고 비판했다.

은행이 낮은 신용도를 이유로 돈이 급한 서민들을 외면하자 당사자들이 `살인금리'를 무는 사채시장까지 내몰리게 되다 보니 은행 기능에 회의가 커졌다는 것이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도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 차)으로 돈을 벌려는 은행의 영업행태가 금융권의 모럴해저드를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강 국장은 "은행의 대부분 수익은 예대마진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대출금리처럼 소비자와 맞닿는 부문에서 금융기관의 탐욕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금융기관과 금융권 종사자들의 소명의식이 사라지는 현실도 금융권 모럴해저드의 원인으로 꼽았다.

강 국장은 "근본적으로 보면 금융기관의 윤리의식이나 철학이 없다. 그러다 보니 회사는 직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직원들은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고객 돈을 빼돌리거나 고객의 서명을 위조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업은 공공서비스에 가까운 기능을 한다. 과거에 은행원이라고 하면 신뢰도가 가장 높은 직업 중 하나였는데 최근에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행태가 나타난다"고 질타했다.

◇"피상적ㆍ일회성 대책은 불신 더 키운다"

최근 금융권에서 내놓은 서민금융 지원 방안에는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이 많다.

전문가들은 금융권이 신뢰를 회복하려면 수익구조를 선진화하고 직원교육을 통해 소명의식을 키우는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필상 교수는 "우리 금융산업의 낙후성을 분석ㆍ반성하고 개선책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일련의 대책은 책임 회피를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며 "피상적인 대책은 오히려 불신을 더 키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금융기관이 주인의식을 갖고 내부고발자 보호 제도를 강화함으로써 내부 통제기능을 제대로 작동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강 국장은 "은행이 직원들의 소명의식 교육을 강화해 고객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예대마진 위주인 금융기관의 수익구조를 더욱 다양화해 대출금리로 돈을 벌려는 영업행태를 불식해야 한다고 주장도 나왔다.

낙하산 금융회사 수장은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모럴해저드를 악화한다는 비판도 있다.

전 교수는 "정권 창출에 이바지한 사람이 보은인사로 금융기관 수장이 되는 것은 경영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고 통제하는 사람과 통제받는 사람 간 괴리를 불러온다"며 합리적인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현재 은행에 문제가 발생하면 담당 직원과 법인이 함께 벌을 받는데 해당 직원을 감독한 사람, 그 사람을 감독하는 사람 식으로 책임자를 확대함으로써 내부통제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당국이 금융권의 모럴해저드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것을 질책하며 금융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당부도 했다.

이 교수는 "그간 금융당국은 정치논리로 금융정책을 운용하는 측면이 컸다. 게다가 (저축은행 사태에서 보듯이) 당국이 비리의 주체가 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비판했다.

요즘 화두가 된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정치권과 금융 당국이 서민이나 중소기업을 사지로 내모는 금융시스템을 고치는 근본적인 대안을 만들어 시행해달라는 요청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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